이목하 작가가 서울 제기동 작업실에서 작업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솔 기자
이목하 작가가 서울 제기동 작업실에서 작업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솔 기자
“이목하 작가가 대체 누구야?”

‘그림 좀 산다’ 하는 국내 컬렉터들은 지난달 초 이런 질문을 서로 주고받았다. 세계 최고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처음 보는 한국 작가 소개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트바젤이 매년 가장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 25인을 꼽는 ‘디스커버리즈’에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더 놀라운 건 작가가 1996년생(27세)이라는 점. 올해 뽑힌 작가 대부분은 30~40대고, 50대도 있다. 20대는 그가 유일하다. 세계적인 작가들이 두드리는 등용문을, 무명에 가까운 젊은 한국 작가가 당당히 넘은 것이다.

급히 인터뷰 약속을 잡고 작가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서울 제기동 탄천변에 있는 철물점 옆 낡은 빌딩. 계단을 두 층 올라 정수기 수리업체 사무실과 한약 냄새를 풍기는 건강식품 업체를 지나니 문패가 없는 이 작가의 작업실이 보였다. “이래 봬도 대출까지 받아서 마련한 작업실이에요.” 문을 열고 나온 이 작가가 웃었다. 허름한 빌딩에서 어렵게 작업하는 젊은 작가, 그리고 세계 미술시장의 떠오르는 ‘스타’. 극과 극의 수식어 사잇길을 한발 한발 걷고 있는 이목하를 이달 초 만났다. 이어진 홍콩 아트바젤에선 그의 그림이 팔리는 순간을 직접 지켜봤다.

SNS 속 얼굴에 담은 고독과 불안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서 제이슨함 부스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이목하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홍콩=성수영 기자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서 제이슨함 부스를 방문한 관람객들이 이목하 작가의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홍콩=성수영 기자
이 작가는 1주일에 6일 이곳으로 출근한다.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하루 9시간 이상. 전시나 아트페어 등 마감이 있으면 1주일 내내 밤을 새워가며 작업하기 일쑤다. 이렇게 1년에 10점 정도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는 주로 젊은 여성의 초상을 그린다.

“사람 얼굴을 그리는 건 쉽지 않아요. 눈동자의 색이나 입꼬리의 미묘한 모양처럼 아주 조그만 부분만 바뀌어도 전체적인 인상이 확 바뀌거든요. 하지만 초상화는 그런 어려움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 자신을 그림 속 얼굴에 녹여낼 수 있고, 관람객도 그림 속 얼굴을 보며 직관적으로 여러 감정과 정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낯선 사람을 볼 때 몇 초 만에 첫인상이 각인되는 것처럼요.”

‘모델’을 구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①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쭉 스크롤하다가 ②‘느낌’이 오는 사진을 고른 뒤 ③계정 주인에게 연락해 소정의 사례비를 내고 사진을 그릴 수 있는 권리를 산다. 실제 모델을 세우는 대신 SNS에 올라온 모르는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작품 제작 과정은 컬러 프린터가 결과물을 출력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네 가지 색을 한 번씩 차례차례 쌓아올려 최종적인 색을 만든다. 예컨대 먼저 보라색으로 그림을 그린 뒤 파란색으로 그 위에 한 번 더 그리고, 빨간색을 덧칠한 뒤 검정색을 가미해 마무리하는 식이다. 특별히 만든 캔버스와 투명할 만큼 옅게 만든 유화 물감을 쓴 덕분에 빛바랜 사진 같은 색감과 질감이 만들어진다.
아트바젤이 SNS에 올린 
이목하 작가의 작품 'Ego Function Error'.
아트바젤이 SNS에 올린 이목하 작가의 작품 'Ego Function Error'.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낸 그림 속에서는 특유의 명암과 그림자가 미묘한 긴장감을 연출한다. 그림 속 사람들의 행동만 보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느낌이 확 달라지는 것도 독특한 기법 덕분이다. ‘Ego Function Error’가 그런 작품이다. 해맑게 웃는 듯한 여성의 눈과 입꼬리에서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고독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표 작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가 떠오르기도 한다.

“회화로 일가 이루고 싶다”

이 작가의 시작은 일반 다른 미대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미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미술만 해서 먹고사는 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한정 지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집이 부유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미대생과 달랐던 건 그가 전업 작가를 꿈꾸며 계속 그리고 또 그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새벽까지 학교에서 작업하던 2019년 어느 날, 완성한 작업을 보고 ‘이게 내 그림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화풍의 작업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면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하지만 당장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작업실 임차료와 작업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내 작품의 가치가 인정받을 때까지,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하면서 계속 작업을 하려는 생각이었죠.”

세계 어디서나 그림 그려서 먹고사는 건 힘들다. 젊은 작가가 처한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20대 작가 작품이라는 이유로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이런 편견을 이겨냈다. 이미 숱한 국내외 미술계 명사들이 작업실을 다녀갔고, 해외 갤러리 여러 곳으로부터 “전시해달라”는 요청도 받고 있다.

“다행히 작업실을 그럭저럭 운영할 정도까지는 수입이 안정화됐습니다. 그 덕분에 요즘은 더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만 집중하고 있어요.”

이루고 싶은 꿈을 묻자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제노 엑스(Zeno X)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페인팅의 정점에 오른 작가들이 전시하는 곳이거든요.”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일찌감치 성공의 기회를 잡았는데도 이 작가는 전혀 들뜬 구석 없이 시종일관 진지했다. ‘잘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아트바젤 홍콩에서 맞아떨어졌다. 개막 첫날인 21일, 이 작가가 이번 아트페어에 내놓은 작품 4점은 ‘완판’돼 서울과 홍콩, 유럽으로 흩어졌다.

홍콩=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