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화백 "작업 위해 방사선치료 안 하기로…고향 예천 미술관은 포기 상태"
"박서보미술관, 응어리진 마음 치유할 수 있는 곳 되길"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나서 나에게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처음 2∼3일만 흔들리다 내가 암이라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렸어요.

"
수행하듯 끊임없이 선을 긋는 '묘법' 연작으로 유명한 단색화가 박서보(92) 화백은 14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열린 박서보 미술관(가칭) 기공식에서 기자들과 만나 최근 폐암 판정을 받은 이후 소회를 담담히 털어놨다.

지난달 말 암 투병 사실을 공개한 이후 이날 처음 공개석상에 나선 박 화백은 간간이 기침을 하긴 했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기자간담회에는 휠체어에 탄 채 참석했지만 이어 진행된 기공식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 서서 주변 지인들과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박 화백은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이걸 다 어떻게 하라고 나에게 이런 형벌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정리하고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기로 했다.

새로 시작한 작업을 위해서였다.

"암은 친구로 모시고 함께 살자, 치료는 3개월에 한 번씩 몸 상태를 검증하며 슬슬 봐가면서 하자고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렇게 하기로 한 이유가 방사선 치료를 하게 되면 일을 못 하니까요.

"
새로 시작한 작업은 신문지 위에 연필과 유화물감으로 드로잉하는 일이다.

몸 상태를 고려해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찾았다.

"내가 과거에 했던 작업인데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일상적인 일을 다 잊고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선택했어요.

빨리 안 데려가 주면 일을 충분히 해내고선 죽을 텐데… 그런 기대감 하나 믿고 일을 시작하고 있어요.

나한테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진단을 받고) 처음에 2∼3일만 흔들리다 내가 암이라는 생각조차 다 잊어버렸어요.

"
"박서보미술관, 응어리진 마음 치유할 수 있는 곳 되길"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미술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여기 와서 그림을 보고 나면 그 속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려서 치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내 그림이 대중을 치유하길 원해요.

그게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미술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또 하나는 나와 동시대에 살면서 역할을 했던 좋은 작가들의 개인전도 하고 그분들의 작품을 한쪽에서 전시해서 한 시대의 연대성 같은 것도 강조하고 그랬으면 합니다.

제주까지 돈 들이고 오는 분들이 헛수고했다는 생각은 안 들게 준비하겠습니다.

"
한편 박 화백은 한 때 고향인 경북 예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유명 건축가 페터 춤토르에게 예천 미술관 설계를 의뢰하려 했으나 공립미술관 건립에 필요한 공모 절차 등의 문제로 무산됐다고 소개하며 "제주의 미술관은 (예천 미술관과는) 별개로 진행해왔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 대가로 꼽히는 박 화백은 1967년 연필로 끈임없이 선을 긋는 묘법(妙法) 작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묘법 작업은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린 뒤 도구를 이용해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 발전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유채색 작업으로 또 한번 변화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해 오던 중 지난달말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스스로 공개했다.

"박서보미술관, 응어리진 마음 치유할 수 있는 곳 되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