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 89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리라,
그대의 말에 구태여 변명 아니하며.
사랑을 바꾸고 싶어 그대가 구실을 만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아니하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아는 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 영국 시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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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위해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참으로 애틋하고 절절한 시죠? 사랑은 우리를 봄날 풀꽃처럼 부드럽게 만듭니다. 사랑에 빠지면 육체의 눈만 아니라 마음의 눈도 멀게 되지요.

‘사랑은 모든 방황하는 배의 북두칠성’

400여 년 전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그랬습니다. 어떤 허물도 너그럽게 감싸고, 어떤 결함도 포근하게 껴안는 사랑의 청맹과니! 사랑은 영혼의 일탈까지 부드럽게 보듬어 안는 마법의 팔을 지녔죠. 더욱이 ‘그대의 뜻이라면 지금까지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지고지순의 사랑. ‘소네트 89번’의 마지막 두 행은 사랑의 숭고함을 가장 뛰어나게 묘사한 절창 중의 절창입니다.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나 또한 사랑할 수 없나니.’

이렇게 헌신적인 마음의 극점에서 영원한 사랑의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은 영속의 노래이기도 하죠. 셰익스피어는 ‘변화가 생길 때 변하고/ 변심자와 같이 변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노래처럼 ‘사랑은 모든 방황하는 배의 북두칠성’이자 ‘폭풍을 겪고도 동요를 모르는 지표’이지요. 그러니 진실로 한 사람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고도는 측량할 수 있어도 진가는 다 알 수 없는’ 영원무한의 우주와 같습니다.

4대 비극보다 더 애절하고 달달한…

소네트란 일정한 운율과 형식을 갖춘 14줄짜리 사랑시를 말하지요.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154편의 소네트를 남겼는데, 그의 4대 비극보다 더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인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지요.

그러나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시인’이라는 그의 명성과 달리 그의 러브스토리는 알려진 게 별로 없습니다. 1564년 영국 남부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여덟 살 연상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는 사실만 확인됐지요. 그는 대학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예술에 대한 감각으로 최고의 극작가가 됐죠.

그가 <소네트 시집>을 쓴 기간은 스물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2년 남짓이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죠. 이 작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작품마다 사랑과 우정, 이별과 회한의 정조를 배면에 깔고 있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저마다 다른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곤 하지요.

시집의 전체 내용은 시인과 귀족 청년, 검은 여인의 삼각관계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젊은이와 검은 여인이 시인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의인화돼 있는 게 특징이지요.

지금이야 소네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만 출간 당시에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관계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 등 내용이 부도덕하다는 게 이유였다고 합니다. 하긴 그때가 17세기 초였으니 지금에 비하면 숨 막히는 시절이라고나 할까요.

참고로 <소네트 시집>을 번역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셰익스피어는 때로는 속되고 조야하고 쌍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문학의 바탕은 사랑의 미(美)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봄 애틋하고 달달한 ‘사랑의 미(美)’로 봄꽃같이 향기로운 시절 누리시길 빕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