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가 지난달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가 지난달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54)는 세기의 명반(名盤)을 남긴 피아니스트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시마노프스키 독주곡’(2005년 발매), ‘바흐 영국 모음곡’(2014년 발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권’(2021년 발매)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클래식 음반상인 그라모폰상을 휩쓴 연주자라서다.

그의 이름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90년 영국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자신의 연주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공연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 이 사건으로 그는 우승자보다 더 유명해졌다. 맹랑한 태도 뒤에 뛰어난 연주력이 자리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연주자지만, 해외에서는 독창적인 작품 해석력과 완성도 높은 연주로 각광받는 피아니스트다. “모던 피아노에 부여된 음색의 팔레트를 전부 사용하는 연주자”(뉴욕타임스), “영감이 깃든 화려함”(가디언). 그에게 쏟아진 찬사들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리사이틀 무대에 오른 안데르제프스키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등장해 아주 잠시 숨을 고른 뒤 곧바로 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첫 곡은 바흐의 ‘파르티타 6번’. 그는 섬세한 터치로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프랑스 춤곡에 담긴 생동감을 표현해냈다. 뼈대가 되는 음은 강한 타건으로, 나머지 음은 흐르듯 가벼운 터치로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살려냈다.

그의 연주는 바흐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뚜렷한 방향성으로 모든 음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연주하면서도 정해진 박자의 틀을 벗어나거나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시마노프스키의 ‘마주르카 중 3·7·5·4번’을 연주할 때 그는 건반을 얕게 스치는 듯한 가벼운 손놀림으로 폴란드 춤곡의 신비로운 매력을 온전히 살려냈다. 왼손과 오른손을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유선형의 자연스러운 울림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마치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듯했다.

그는 이날 기존 곡 배열 순서를 따르지 않고 4개 곡의 순서를 임의로 정해 연주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차분한 악상(3번)에서 시작해 힘찬 타건과 화려한 색채로 응축된 에너지를 발산(4번)하며 끝맺는 구성에서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 해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레퍼토리에는 33년 전 콩쿠르 도중 연주를 멈췄던 바로 그 곡도 있었다. 바로 베베른의 ‘변주곡’. 안데르제프스키는 숨 막힐 듯한 정적과 극적인 악상 표현을 넘나들면서 낯선 현대곡의 매력을 살려냈다.

망치로 유리를 깨뜨리는 듯한 강렬한 타건과 날카로운 음색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했다. 그러다 한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여운을 남기며 베베른이 의도한 ‘응축된 짜임새’를 청중에게 오롯이 전달했다. 예측 불가한 진행으로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안데르제프스키는 어떠한 신호도 없이 다음 곡을 이어갔다.

그렇게 등장한 곡이 바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 명료한 터치와 따뜻한 음색으로 구현한 베토벤 특유의 깊이 있는 서정성이 음산한 기운을 드리웠던 이전 곡과 명확한 대비를 이뤘다.

극적인 장면 전환을 이뤄낸 그는 처연한 음색으로 애절한 선율을 노래하다가도 금세 호쾌한 타건으로 밝은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마치 베토벤이 고통 속에서 끝없이 열망했던 희망을 재현해내려는 의도로 읽혔다.

다이얼을 돌려 맞추듯 자연스럽게 소리의 강약과 표현의 완급을 조절하는 연주는 작품 속 풍부한 정감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절정에서 힘을 가해 소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건반에 무게감을 겹겹이 쌓아가며 만들어내는 장대한 울림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안데르제프스키의 연주는 다닐 트리포노프, 조성진처럼 모든 음에 열정을 쏟아부으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선사하는 연주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세심한 터치로 만들어내는 선율은 격렬하다기보다 유려했다. 화려한 기교로 건반 위를 질주하기보다 다채로운 음색으로 작품 본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충실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이어갈 수 없다며 무대를 박차고 나왔던 그의 음악은 세월과 함께 원숙해져 있었다. 흔한 국제 콩쿠르 우승 타이틀 하나 없이 30여 년간 끊임없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해온 저력이 무엇인지 보여준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