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입시학원 강사서 5년 전 서귀포에 '키라네 책부엌' 연 이금영 씨
'올해의 문화도시' 서귀포의 '마을라운지' 조성에 동참
제주 동네 책방지기 "음식 이야기 공간, 삼촌들 사랑방이죠"
"처음에 주변 삼촌(남녀 구분 없이 연장자를 이르는 제주 방언)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관광객도 안 오는 외진 곳에 밥집도 아닌, 책방을 차린다고요.

"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책방 '키라네 책부엌'을 운영하는 이금영(44) 씨는 "지금 생각하면 안 할 텐데, 그 당시엔 무조건하고 싶었다"고 떠올렸다.

지난 23일 책방에서 만난 이씨는 과학고, 영재고 등 특목고 지망 학생들을 가르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입시학원의 화학 강사였다.

원래 제주에 호감이 없었다는 그는 "우연히 3개월간 해외로 여행을 떠난 지인의 집을 돌봐준 게 계기였다"며 "이때 너무 좋은 마을 주민들을 알게 되면서 제주가 좋아져 살게 됐다.

옛날집을 리모델링해서 책방으로 꾸몄다"고 말했다.

키라는 그의 영어 이름이다.

제주 동네 책방지기 "음식 이야기 공간, 삼촌들 사랑방이죠"
지난 2018년 문을 연 이곳이 여느 동네 책방과 다른 건, 따뜻한 음식 이야기가 있는 책방이란 점이다.

책방에는 알랭 드 보통의 '사유 식탁'을 비롯해 '식탁과 화해하기', '카모메 식당',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우선 이것부터 먹고' 등 음식 관련 소설과 에세이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있었다.

책뿐 아니라 부엌에서 쓰는 요긴한 소품과 '귤사믹'(귤로 만든 식초)과 같은 제주의 건강한 재료로 만든 식료품도 발굴해 함께 판매한다.

이씨는 "육지에 살 때 음식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게 힐링 방법이었다"며 "다른 사람들이 위안을 얻는데도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음식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 동네 책방지기 "음식 이야기 공간, 삼촌들 사랑방이죠"
무엇보다 이곳은 동네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귀포시 문화도시센터가 마을의 책방과 카페, 공방 등 민간 소유 공간을 지역주민 문화 활동 장소로 활용하는 '마을라운지' 47곳 중 하나다.

105개 마을이 자연에 적응하며 노지(露地) 문화를 일군 서귀포는 23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처음 발표한 '2023 올해의 문화도시'로 선정됐다.

이씨는 "책방을 동네 사랑방처럼 마을라운지 공간으로 쓴다"며 "서울에선 문화생활을 많이 누릴 수 있지만 시골이니 문화 불균형이 심한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밤에 공방에 가서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영화관이 없어 사진관으로 쓰는 스튜디오에 영화를 보러 간다.

슬리퍼를 신고 다닐 수 있어 '슬세권'이라고 부른다"고 웃었다.

이씨가 마을라운지 조성에 동참한 건, 3년 전 서귀포시 문화도시센터가 진행한 '책방데이' 프로그램이 인연이 됐다.

책방데이는 동네 책방을 통해 주민들이 문화를 누리도록 하자는 취지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열렸다.

이씨는 책방데이 때 쿠킹 클래스를 프로그램에 넣기도 했다.

제주 동네 책방지기 "음식 이야기 공간, 삼촌들 사랑방이죠"
작은 공간을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면서 오고 가는 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삼촌들이 호박이나 지금이 제철인 유채 나물도 한 아름 두고 가세요.

지나가다 손님이 없으면 커피도 마시고요.

"
책방을 찾는 손님은 중장년층이 많다.

온라인에서 사전 예약을 받아 1시간에 한 팀씩 개인 서재처럼 이용하도록 한다.

이씨는 "은퇴를 앞뒀거나 은퇴한 분들, 전원생활을 꿈꾸는 분들, 어린 시절 책방의 추억을 가진 분들이 온다"며 "가족들이 오기도 하는데, 대체로 손님들이 무척 특이하다.

육지에서 먹는 간식이나 직접 만든 문진 같은 선물을 쥐여주고 가신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에 살아보니 전 관광객도, 토박이도 아닌 경계에 선 사람이었다"며 "1년간 귤을 따러 다녔는데 그때 삼촌들이 식당에서 팔지 않는, 제주의 음식을 많이 얘기해주셨다.

저도 주민들에겐 육지에 이런 음식과 이야기가 있다고, 관광객이나 이주민에겐 제주에 이런 게 있다고 알려주면서 책방을 서로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