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범람하는 시대…"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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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넷플릭스와 왓챠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는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가득하고, 각종 전자책과 만화책은 흥미를 돋운다.
소셜미디어(SNS)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이 빠르게 돈다.
각종 매스 미디어는 실시간으로 뉴스를 쏟아낸다.
그런 이야기의 대해(大海) 속에서 우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꾼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이런 상황을 보면 분명 개탄했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며 이야기꾼을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야기 혐오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기인한다.
탁월한 이야기꾼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대중들은 그의 글에 '전염'됐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미나리를 마시고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갔다.
유능한 이야기꾼은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조종할 줄 알았다.
플라톤이 이야기꾼을 경계한 진짜 이유였다.
그에게 건전한 정신(로기스티콘:logistikon) 상태란 논리가 감정과 욕망의 저급한 중추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야기가 "격렬한 감정 반응을 부추기는 게 전부"라고 평가절하했다.
미국 워싱턴·제퍼슨대 영문학과 연구원인 조너선 갓셜도 플라톤의 주장에 일부 동조한다.
신간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위즈덤하우스)에서 그는 이야기가 가진 전염성의 위험을 경고한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을 "구슬림의 마법"이라고 말한다.
그 구슬림이 공감, 이해, 자선, 평화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구슬림의 마법은 "분열, 불신, 증오의 씨를 뿌리는 데에도 더없이 효과적"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 마법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히틀러, 괴벨스, 스탈린, 김일성, 폴 포트 등은 그런 이야기의 대가였다.
그들이 심어놓은 이야기들은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괴물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마흔여섯 살의 미국인 남성이 그랬다.
그는 2018년 어느 날 유대교 회당에 가 "유대인은 전부 죽어야 해"라고 말하며 총기를 난사했다.
11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
그는 경찰특공대의 총에 맞아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은 유대인의 사악한 범죄를 중단시키고자 거사했다며 아무런 이유 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허무주의자 미친개"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이 미국을 사실상 침공하고 있으며 백인을 서서히 절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테러는 미국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었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사람을 구슬린다.
정치적 양극화, 환경 파괴, 무책임한 선동, 전쟁, 증오 같은 우리 문명 최악의 병폐를 부추기는 요인의 이면에는 언제나 마음을 미혹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서사 이동' 때문이다.
이는 콘텐츠의 이야기가 어느덧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야기를 "지루한 대목을 잘라낸" 현실이라고 말한 히치콕이나 "예술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은 그런 마법의 순간을 묘사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꾼은 지휘자처럼 손을 들어 올려 청중의 뇌에 담긴 모든 이미지와 가슴에 담긴 모든 감정을 지휘한다.
그들의 지휘 속에 이야기꾼의 서사는 청중과 관객들의 이야기로 이동한다.
특히 이야기에 담긴 생각과 정보가 개인이 지닌 기존 세계관과 합쳐지는 순간에 그 힘은 극대화한다.
마치 그것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수법과 같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알처럼 낳아두고서 우리에게 그 관념들을 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수법이다.
저자는 이야기가 빚어내는 흑마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이야기에서 과장, 위조, 비논리 같은 허튼소리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이야기에 빠진 '호모 픽투스'임을 알고,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사회에 작용하는 은밀한 방식을 꿰뚫는다면, 우리는 온전히 이야기를 이야기로써 즐길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승영 옮김. 356쪽.
/연합뉴스
소셜미디어(SNS)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이 빠르게 돈다.
각종 매스 미디어는 실시간으로 뉴스를 쏟아낸다.
그런 이야기의 대해(大海) 속에서 우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꾼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이런 상황을 보면 분명 개탄했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며 이야기꾼을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야기 혐오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기인한다.
탁월한 이야기꾼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대중들은 그의 글에 '전염'됐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미나리를 마시고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갔다.
유능한 이야기꾼은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조종할 줄 알았다.
플라톤이 이야기꾼을 경계한 진짜 이유였다.
그에게 건전한 정신(로기스티콘:logistikon) 상태란 논리가 감정과 욕망의 저급한 중추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이야기가 "격렬한 감정 반응을 부추기는 게 전부"라고 평가절하했다.
미국 워싱턴·제퍼슨대 영문학과 연구원인 조너선 갓셜도 플라톤의 주장에 일부 동조한다.
신간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위즈덤하우스)에서 그는 이야기가 가진 전염성의 위험을 경고한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을 "구슬림의 마법"이라고 말한다.
그 구슬림이 공감, 이해, 자선, 평화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구슬림의 마법은 "분열, 불신, 증오의 씨를 뿌리는 데에도 더없이 효과적"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 마법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히틀러, 괴벨스, 스탈린, 김일성, 폴 포트 등은 그런 이야기의 대가였다.
그들이 심어놓은 이야기들은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괴물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마흔여섯 살의 미국인 남성이 그랬다.
그는 2018년 어느 날 유대교 회당에 가 "유대인은 전부 죽어야 해"라고 말하며 총기를 난사했다.
11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
그는 경찰특공대의 총에 맞아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은 유대인의 사악한 범죄를 중단시키고자 거사했다며 아무런 이유 없이 총기를 난사하는 "허무주의자 미친개"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이 미국을 사실상 침공하고 있으며 백인을 서서히 절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테러는 미국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었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사람을 구슬린다.
정치적 양극화, 환경 파괴, 무책임한 선동, 전쟁, 증오 같은 우리 문명 최악의 병폐를 부추기는 요인의 이면에는 언제나 마음을 미혹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서사 이동' 때문이다.
이는 콘텐츠의 이야기가 어느덧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이야기를 "지루한 대목을 잘라낸" 현실이라고 말한 히치콕이나 "예술을 감정의 전염"이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은 그런 마법의 순간을 묘사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꾼은 지휘자처럼 손을 들어 올려 청중의 뇌에 담긴 모든 이미지와 가슴에 담긴 모든 감정을 지휘한다.
그들의 지휘 속에 이야기꾼의 서사는 청중과 관객들의 이야기로 이동한다.
특히 이야기에 담긴 생각과 정보가 개인이 지닌 기존 세계관과 합쳐지는 순간에 그 힘은 극대화한다.
마치 그것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수법과 같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알처럼 낳아두고서 우리에게 그 관념들을 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수법이다.
저자는 이야기가 빚어내는 흑마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고 "이야기에서 과장, 위조, 비논리 같은 허튼소리의 낌새를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이야기에 빠진 '호모 픽투스'임을 알고,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사회에 작용하는 은밀한 방식을 꿰뚫는다면, 우리는 온전히 이야기를 이야기로써 즐길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승영 옮김. 356쪽.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