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3대 개혁 과제 중 하나인 연금개혁은 현재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연금특위는 지난달 전체회의에서 연금개혁의 방향과 과제로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의 재정 개혁'을 명시했다. 이미 지난 2000년 사실상 기금이 소진돼 해마다 국고로 적자를 보전하고 있는 공무원연금도 개혁 대상이 포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기대와 달리 정치권에서 정부와 여야가 내년 총선 전 연금개혁에 들어가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국회 특위 활동도 지속할 동력을 사실상 잃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여야 특위 간사는 이달 초 국민연금의 개혁 방향을 당초 언급했던 모수개혁에서 구조개혁으로 선회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부터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핵심적인 수치를 뺀 개혁안 초안을 내놓을 것이 유력한 상황에서, 공무원연금 개혁까지 입에 올리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국회 입법조사처가 지난 22일 2015년 영국의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과 후속 조치를 다룬 보고서를 내놔 주목된다. 입법조사처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문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낸 영국의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이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며 보고서 발간 배경을 설명했다.

영국 공무원연금 개혁, 뭘 했나

영국은 공공 부문 연금 지출 절감, 민간 연금 제도와의 형평성 제고 등을 위해 2015년 공무원연금을 개혁을 단행했다. 기대수명 증가로 공무원연금 수급자가 늘어 재정 부담은 커졌지만, 출산율 하락과 신규 공무원연금 가입자 감소로 공공부문 연금의 정부 재정지출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2015년 개혁을 통해 기존 공무원연금 제도보다 가입자 비용 부담이 크고, 연금 지급 개시 연령이 상향되는 신규 제도(alpha)를 도입했다.

새 제도는 공무원연금 개시 연령을 높여 국가연금과 같도록 조정했다. 60세이던 공무원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2018년까지 65세로 높이고, 국가연금 수급 개시 연령 상향 시기에 맞춰 공무원연금도 2020년까지 66세로 조정하도록 했다.

또 연금 인상 방식을 도매물가지수(RPI)에서 소비자물가지수(CPI)로 바꿨다. CPI의 경우 RPI보다 인상률이 낮기 때문이다.

연금 급여액 산정 기준은 퇴직 시 최종 보수에서 생애 평균 급여로 변경했다. 이를 통해 저소득자의 연금 급여율은 이전보다 증가하나, 고소득자는 감소하게 됐다. 공무원 조직 내 소득 재분배 효과를 강화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존 제도(nuvos) 가입자들을 새 제도로 편입시키면서 약 50년간 연금 관련 정부 순지출이 40%, 약 4000억파운드(2011년 환율 기준 약 720조 원) 절감되도록 했다.

다만 개혁 과정에서 정년까지 13.5년 이하 남은 가입자들에 대해서는 기존 제도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경과 조치도 뒀다. 이는 신입 공무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추후 영국 법원도 이 같은 경과조치가 연령 차별을 초래해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영국 정부는 나이와 가입일에 관계없이 2022년 3월 31일까지 기존 제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위해 부담해야 하는 추가 비용은 약 170억파운드(약 26조원)로 예상된다.

개혁 당사자 간 합의로 이뤄낸 개혁

입법조사처는 영국 공무원연금 개혁의 성과로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로 이뤄진 개혁'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2015년 영국의 개혁은 '허튼 보고서'에 기반해 이뤄졌다. 2010년 출범한 보수당 중심의 보수·자민당 연립정부는 연정 구성 협상을 통해 '공공부문 연금의 지속가능성' 검토를 위한 '공무원연금정책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같은 해 연정은 직전 노동당 정부의 고용연금부 장관이었던 존 허튼을 위원장에 임명하고 보고서 제출을 맡긴다.

허튼 보고서에는 개혁의 원칙으로 '국민과 이해 관계자들의 공개 토론 속에 지속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영국 정부와 공무원 노조는 파업이라는 극단적 대치 상황 속에서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이지만 충분한 대화와 조정을 통해 정부와 공무원 노조가 절충안을 마련해냈다.

영국 정부는 "공무원과 납세자인 시민 모두가 공평하도록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며 노조를 압박·설득하는 동시에 당근책도 내놨다. 좀 더 관대한 연금 적립률, 연금 수령까지 10년 이하로 남은 가입자들에 대한 과도기적 보호 등이다. 이 제안에 노조도 화답했다.

50년간 연금 정부 순지출 40% 절감

무엇보다 개혁의 최대 성과는 정부의 재정 부담을 완화했다는 것이다. 2012년 영국 재무부가 발간한 '공무원연금 개혁 법안의 영향 평가' 보고서는 개혁 추진으로 2061~2062년(회계연도 기준)까지 연금 관련 정부 순지출이 40% 절감될 것으로 전망했다.

2020년 영국 정부는 △소비자물가지수로 연금 인상률 전환, △공무원연금 가입자의 기여율 증가, △생애 평균 급여로 연금 급여액 산정 기준 변경 등을 핵심으로 하는 개혁을 통해 세금으로 지출되는 공무원연금 예상 비용이 50년 동안 약 4000억파운드 절감될 것으로 추산했다. 또 2018년 재정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개혁으로 영국 GDP 대비 공무원연금의 정부 부담률도 2022~2023년 2.1%로 정점을 찍고, 2064~2065년 1.5%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여야 간사와 민간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이 지난 8일 국회에서 연금개혁 초안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했다. 연합뉴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여야 간사와 민간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들이 지난 8일 국회에서 연금개혁 초안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했다. 연합뉴스

한국은 어떤가

국회 연금특위는 이달 말께 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를 통해 연금개혁안 초안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그러나 국회가 국민연금 모수개혁도 손을 놓은 상황에서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까지 구체적으로 건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연금 전문가들은 국민연금보다 오히려 개혁이 시급한 것은 직역연금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38조2000억원(불변가격 기준)인 4대 공적연금 재정수지는 2040년께 적자로 전환한 뒤, 2070년 적자 규모가 242조7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국민연금 적자 규모가 211조원으로 가장 크고, 공무원연금(19조3000억원), 사학연금(7조2000억원), 군인연금(5조2000억원) 순이다. 그러나 국민연금 재정 문제는 2057년 이후인 ‘미래형’인 반면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 기금은 이미 수십 년째 적자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는 평가다.

예정처는 정부가 만성적자에 빠진 공무원연금을 개혁하지 않을 경우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투입해야 하는 국가 예산이 2021년 수급자 1인당 월 46만원에서 2040년 87만원으로 불어날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향후 19년 동안 공무원 한 명의 노후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쓰일 재정이 두 배 규모로 불어난다는 의미다. 예정처는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공무원 확대 정책으로 재정 악화가 가속화되는 시점을 2040년 안팎으로 제시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