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화장실에 있는 샴푸부터 지구 밖에서 오는 햇빛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을 이루고 있는 화학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교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화학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화학이 실생활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김지원 옮김, 문학수첩, 296쪽, 1만6000원)
일본에 자이니치(在日)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재일 한국인과 재일 조선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1945년 약 200만 명에 달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60만 명은 일본에 남았다. 그들은 ‘특별영주자’라는 모호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완전한 외국인도, 완전한 일본인도 아니었다. 차별은 여전했고,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쉽지 않았다. 참정권도 없었다. 한국과 북한의 갈등 속에 재일 교포들도 민단과 총련으로 나눠 반목했다.그 가운데 권리 향상을 위한 자이니치들의 투쟁이 있었다. 원자폭탄 피폭 치료를 받을 권리를 위해 싸웠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도 일본에서 변호사가 될 수 있기 위해 싸웠다. <공생을 향하여>는 그 자이니치들의 투쟁사를 그린 책이다. 저자인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86)는 재일 외국인 문제에 오랫동안 목소리를 내온 일본의 대표적인 지한파 지식인이다. 책은 마이니치신문 출신 프리랜서 언론인 나카무라 일성(54)이 다나카 교수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다나카 교수가 반세기 동안 직접 참여하거나 가까이서 지켜본 자이니치 투쟁사를 시계열 순으로 정리했다.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손진두(1924~2014)는 1944년 가족과 함께 히로시마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피폭당했다. 미쓰야마 후미히데라는 일본 이름까지 갖고 있었지만, 패전 후 일본은 그를 국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외국인으로 등록하지 않자 1951년 그를 한국으로 쫓아버렸다. 1970년 피폭 치료를 위해 여러 차례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한 그는 8개월 징역형까지 받게 되고, 그때 다나카 교수의 도움을 받는다.다나카 교수는 ‘피폭자 건강수첩’이란 제도에 국적 제한이 없다는 걸 발견했지만, 후쿠오카현과 후생노동성은 막무가내로 수첩을 교부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1978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원폭의료법은 피폭에 따른 건강상 장애의 특이성과 중대성으로 인해 그 구제 대상은 내외국인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는 해외에 거주하는 피폭자도 치료 대상으로 하는 오늘날 피폭자원호법 제정의 근거가 돼 피폭 한국인은 물론 해외에 사는 일본인까지 혜택을 보게 됐다.재일교포 2세인 박종석(72)도 있다. 아라이 쇼지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고교를 졸업하고 1970년 일본 대기업인 히타치소프트웨어 도츠카 공장에 입사했다. 그런데 회사는 뒤늦게 그가 한국인인 걸 알고 채용을 취소했다. 상당히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비슷한 또래 재일교포 사이에서 ‘박군을 둘러싼 모임’이 결성됐고, 한국에선 히타치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소송을 통해 1974년 해고 취소 판결을 받은 그는 2011년 60세로 정년을 맞기까지 계속 히타치에서 일할 수 있었다.다나카 교수는 박종석 사건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본다. 재일 1세대에게 일본은 어쩔 수 없이 건너온 곳이었다. 타향이었다. 2세대는 다르다. 일본이 고향이다. 태어나 자라고 앞으로도 살아갈 곳이다. 현실에 순응한 1세대와 달리 2세대들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선 이유라고 설명한다.김경득(1949~2005)도 그랬다. 1972년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한국인인 걸 숨겼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아사히신문 입사가 거부된 후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197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려면 일본인으로 귀화해야 했다. 그는 버텼다. 소송을 통해 일본 변호사 자격에서 국적 조항을 없앴다. 그렇게 그는 자이니치 1호 변호사가 됐다.자이니치들의 투쟁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증오와 폭력으로 맞선 투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목적은 ‘공생’이었다. 일본은 그들에게 고향이고, 전복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가꿔나갈 대상이었다. 이는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나라에 가서 섞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지난해 2월 세상을 떠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사진)의 전집이 출간됐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을 지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평가받았다.타계 1주기를 맞아 이어령 전집을 내놓은 출판사 21세기북스는 17일 “이어령 교수는 20대 초반 문단에 데뷔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지식의 최전선에서 오로지 글로서 싸웠다”며 “여러 세대 독자에게 오랜 시절 사랑받고 있는 그의 작품을 꼼꼼히 확인해 오류를 바로잡고 중복 게재된 내용을 정리해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어령 교수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위원, 새천년준비위원장,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21년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돼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이어령 전집은 모두 24권으로 이뤄졌으며 전체 분량은 1만4840쪽에 이른다. 에센셜(5권), 베스트셀러(5권), 크리에이티브(2권), 아카데믹(4권), 사회문화론(4권), 한국문화론(4권) 등 여섯 가지 컬렉션으로 분류됐다. 에센셜 컬렉션은 <축소지향형 일본인> 등 이어령의 탁견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한다. 베스트 컬렉션(5권)에서는 대표작을 주로 담았다.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등이다.크리에이티브 컬렉션은 작가로서 이어령의 모습에 집중했고, 아카데믹 컬렉션은 문학에 대한 마음을 주로 전한다. 그는 1956년 서울대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라는 평론을 기고해 주목받았다. 30대 젊은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1972년 10월 문예지 ‘문학사상’ 창간호에 “문단의 문학을 철저히 파괴해 만인의 문학이 될 수 있게 하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전집 추천사에서 “이어령 선생이 자랑해온 우리 언어와 창조의 힘, 우리 문화와 자유의 가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상생과 생명의 의미는 이제 한국문화사의 빛나는 기록이 됐다”고 밝혔다.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
2001년 7월 16일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고 있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 일본 ‘국민 타자’ 스즈키 이치로가 타석에 오르자 마운드에 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투수 김병현이 씩 웃었다. 이날 김병현이 이치로를 퍼펙트로 처리하자 한국 팬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인터넷은 “저 자신만만한 미소를 봤냐. 김병현이 일본 타자를 작정하고 응징했다”는 글로 도배됐다.진실은 18년 뒤 스포츠 전문기자 전훈칠과의 인터뷰에서 드러났다. “제가 이치로 팬이었거든요. 직접 만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나왔어요.” 사실은 그저 좋아하는 선수와 승부할 생각에 들떴을 뿐이었던 것이다.<메이저리그, 진심의 기록>은 전직 기자가 유명 메이저리거들의 인생 이야기를 정리해 모은 책이다. 책은 베이브 루스와 마리아노 리베라 등 해외 선수부터 이치로와 오타니 쇼헤이 등 일본 선수, 박찬호 추신수 김병현 류현진 등 한국 선수들의 이야기를 아우른다. 한국 선수들을 다룬 내용이 특히 흥미롭다. 기자가 직접 선수들을 만나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덕분이다.‘원조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2019년 LA 다저스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류현진을 평가한 내용이 단적인 예다. “박찬호는 류현진에게 부러운 점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지금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구선수에게 내일 경기가 없다는 건 미래가 없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라고 했다. 두 번째는 LA 다저스의 타선이다. 그가 던질 때보다 지금 타선이 훨씬 세다고 했다.”저자는 메이저리거 외에도 야구 영화 ‘머니볼’ 등 야구를 주제로 한 예술, 저자가 응원하는 시애틀 매리너스 구단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펼친다. 주제의 통일성은 다소 약하지만, 막간에 1~2쪽씩 나오는 KBO리그 이야기가 분위기를 환기해준다. 2021년 SSG 랜더스의 베테랑 외야수 김강민이 40세에 투수 데뷔전을 치른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각 장이 완결성 있게 정리돼 있어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담 없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