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화를 노래하다·2


꽃 피기 전엔 더디 핀다 조바심치다
활짝 핀 뒤에는 빨리 질까 속 태우니
이제야 알겠도다. 소옹이 세상 이치 꿰뚫고
꽃을 볼 때 반쯤 핀 순간을 즐긴 이유를.


* 유숙기(兪肅基·1696~1752) : 조선 중기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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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자태는 반쯤 핀 꽃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반쯤 핀 꽃

조선 시대 문인 유숙기의 꽃사랑은 유별났습니다. 특히 분매(盆梅, 화분에 심은 매화)를 좋아해서 꽃 좋다는 소릴 들으면 어디든 달려가 넋을 놓고 감상했지요. 이불과 털가죽으로 정성스레 싸 와서 서재에 모셔 놓고 밤낮으로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매화(梅花)’ 2수를 노래한 뒤 감흥이 남아 다시 2수를 더 지었는데 그 두 번째 것이 바로 이 시입니다. 20권으로 된 그의 시문집 <겸산집(兼山集)> 1권에 실려 있지요.

흩날리는 눈보다 더 희고 고운 자태

첫수는 통상의 매화시와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꽃을 피우는 기상과 흩날리는 눈보다 더 희고 고운 자태, 바람 따라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달빛 아래 춤추듯 일렁이는 그림자….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울듯 꽃도 만개하면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우주 만물과 흥망성쇠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참 이상하죠. 꽃망울이 돋기 전에는 빨리 피기를 재촉하며 안달하고, 꽃이 활짝 피고 난 뒤엔 언제 질지 몰라 속을 태웁니다.

그 기쁘고도 쓸쓸한 마음의 경계에서 유숙기는 옛시인의 명구를 떠올리지요.
‘술을 마셔도 흠뻑 취할 때까지 가지 않고, 꽃을 볼 때도 완전히 필 때까지 이르지 말도록 삼간다(飮酒莫敎成酩酊 賞花愼勿至離披).’

북송 문인 소옹(邵雍·1011~1077)의 절창입니다. 소옹(邵翁), 소강절(邵康節)로도 불리는 그는 만개(滿開)한 꽃보다 반개(半開)한 꽃을 더 좋아했지요. 넘치는 것보다 덜 찬 상태가 더 아름답다는 이치를 체득한 것입니다.

소옹이 <격양집(擊壤集)>에서 ‘봄은 다시 오지 않고, 꽃은 다시 피지 않는다. 사람은 다시 어려지지 않으며,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노래한 것도 마찬가지죠.

곧 ‘분수를 지키면 몸에 욕됨이 없을 것이고(安分身無辱)/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면 마음은 저절로 한가하니(知機心自閑)/ 비록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雖居人世上)/ 오히려 속세를 벗어난 사람과 같게 된다(却是出人間)’는 것입니다.

이는 노자(老子)의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장구할 수 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는 가르침과도 통하지요. 소옹의 시상은 수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였던 성삼문(成三問·1418~56)도 동백꽃을 노래한 대목에서 이렇게 원용했죠.

‘한겨울의 자태를 사랑하는데(我愛歲寒姿)/ 반쯤 필 때가 가장 좋은 때네(半開是好時)/ 피지 않았을 땐 피지 않을까 두렵고(未開如有畏)/ 활짝 피면 도리어 시들어버리려 하네(已開還欲萎).’

몇백 년의 시차를 뛰어넘는 이들의 옛사람들의 교감은 지금 봐도 은은하고 향기롭습니다. 그 시절이나 요즘이나 꽃이 벙글고 지는 모습도 여일하군요.

남녘 들판에 매화 향기 은은하니…

남녘 봄소식을 먼저 알려주는 매화는 전남 순천 낙안의 금둔사 홍매화일 겁니다. 금둔사 홍매화는 동지섣달부터 한겨울 내내 피고 지기를 반복하지요. 날이 추워지면 오그라들고 햇살이 좋으면 피기를 거듭합니다. 이번 겨울엔 개화가 조금 빨라 지난 연말부터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죠.

섬진강 주변에도 봄의 전령이 닿았습니다. 전남 광양 외압마을과 경남 하동 일대에 홍매화가 잇달아 손짓하네요. 제주 한림공원과 휴애리자연생활공원, 대정 노리매공원에도 매화 향기가 가득합니다. 백매화와 홍매화, 청매화에 이어 능수매화까지 자태를 뽐내는군요.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봄은 옵니다. 땅이 꽝꽝 언 다음에야 비로소 망울을 피워올리는 설중매(雪中梅)의 기상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피워올리는 게 봄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번 주말엔 남녘 들판, 바다 한가운데로 봄꽃 향기를 만나러 떠나보시죠.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