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선대회장 때부터 인재양성에 관심…고등교육재단 설립
아들 최태원 회장이 이어받아 민간외교 주역으로 발돋움

고(故)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은 생전 그룹이 후원하는 방송 프로그램 '장학퀴즈' 장원 학생들을 데리고 정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그때마다 최 전 회장은 학생들에게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고, 학생들은 각자 꿈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장원생들과 식사하던 어느 날, 최 전 회장은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대학 졸업 후 우리 회사에 오면 안 된다.

여러분 같은 인재들은 머리가 좋으니 더 좋은 회사로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당부했다.

실제로 장학퀴즈 출신 중 SK에 입사한 사례는 드물다고 한다.

SK그룹이 선경그룹 시절인 1973년부터 후원해 온 장학퀴즈가 이달 18일로 50주년을 맞는 가운데 장학퀴즈에서 고등교육재단, 이천포럼 등으로 이어지는 SK그룹의 인재 양성·지식경영 역사가 눈길을 끈다.

장학퀴즈부터 마이써니까지…대 잇는 SK '지식경영' 역사(종합)
16일 SK그룹에 따르면 최 전 회장은 1972년 MBC가 장학퀴즈 광고주를 구하지 못해 곤란한 처지에 놓이자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봐도 조건 없이 지원하겠다"며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기업 단독 후원을 결정했다.

1980년 장학퀴즈가 500회를 맞을 무렵에는 제작진 등과 식사자리에서 그룹 임원으로부터 장학퀴즈에 대한 누적 투자액이 150억~160억원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럼 우리는 7조원쯤 벌었다.

기업 홍보효과가 1~2조원쯤, 5~6조원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교육시킨 효과"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장학퀴즈 역대 출연자는 약 2만5천명, 방송 시간은 2천시간에 달하며 출연자 중에는 배우 송승환, 가수 김광진·김동률, 국회의원 김두관, 영화감독 이규형 등 각계 리더들도 많다.

최 전 회장은 장학퀴즈 후원에 이어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민간기업 최초의 장학재단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세계적 수준의 학자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설립된 재단은 학비뿐 아니라 생활비 일체를 제공하는 파격적 조건으로 젊은 인재들의 해외 유학 등 학업을 지원했다.

당시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 넘는 유학비용을 지원한다는 공고가 나오자 대학사회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재단 장학생 출신인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현 SK㈜ 이사회 의장)은 "말도 안되는 공고였다.

해외 유학을 가는데 학업 외 아무 조건 없이 엄청난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보장해 준다고 했다"며 "혹시 이상한 종교단체나 중앙정보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으로 의심까지 했다"고 말했다.

재단의 장학사업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지속돼 현재까지 장학생 4천261명을 지원했고 세계 유명 대학 박사 861명을 배출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1호 장학생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최종현 전 회장은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경제계 리더로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시민적 책무를 다해 사회 발전에 헌신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 전체의 큰 지도자로 길이 칭송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이나 연수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이 1975년 워커힐호텔 부지 내에 국내 기업 최초의 연수시설 선경연수원(현 SK아카데미)을 만든 것도 인재 양성에 대한 최 전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에 앞서 1972년에는 인재 양성 비용을 마련하고자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하고 조림사업에 나섰다.

충북 충주 인등산 등 여의도 면적 14배 규모의 부지에 수익성 높은 나무를 심어 매년 100만평씩 벌목해 회사 경영과 무관하게 장학기금을 안정적으로 마련하겠다는 취지였다.

장학퀴즈부터 마이써니까지…대 잇는 SK '지식경영' 역사(종합)
경영을 물려받은 최태원 회장도 선친의 이같은 뜻을 이어받아 지식경영으로 발전시켰다.

최 회장이 구성원들의 통찰력을 키우고자 2017년 만든 이천포럼은 첫해 '지정학적 위기'라는 다소 낯선 개념을 다뤘다.

포럼에 참석한 SK 경영진은 경영 기법 등 익숙한 분야가 아닌 미중 관계 등 글로벌 갈등 구조를 학습하며 이런 요인이 기업 경영에 미칠 영향을 고민해야 했다.

불과 3년 뒤 찾아온 코로나 대유행에 이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지정학적 위기가 현실화하면서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공급망 문제가 지구촌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최태원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종현학술원도 2018년 설립 당시부터 지정학 리스크와 과학 혁신을 주요 의제로 다루며 글로벌 지식교류 플랫폼으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학술원이 매년 미국 워싱턴DC에서 개최하는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는 환태평양 지역 정·관·학계 인사들이 모여 국제 정세를 논의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각국 주요 대학과 학술원이 공동 주최하는 도쿄포럼, 베이징포럼 등도 동아시아 교류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최 회장이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SK실트론 미국 사업장을 찾은 것도 그간 이런 학술활동을 통해 SK그룹이 힘을 쏟은 민간외교의 성과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장학퀴즈부터 마이써니까지…대 잇는 SK '지식경영' 역사(종합)
대를 잇는 SK그룹의 지식경영은 내부 구성원 전반의 역량 강화 노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출범한 SK그룹의 사내교육 플랫폼 '마이써니'는 인공지능(AI), 행복, 사회적 가치 등 8개 분야로 출발해 현재 미래 반도체, 환경 등 13개 분야에서 2천여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수준으로 확장됐다.

기본 지식부터 현장 기술인력에게 필요한 전문 영역까지 폭넓은 수준의 강좌를 제공한다.

최 회장은 2019년 AI시대를 대비한 구성원 역량 강화를 위해 일종의 '사내 대학'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는데, 이 발상이 마이써니를 탄생시키는 발단이 됐다고 한다.

지금은 SK 내부를 넘어 국내 대학과도 강의를 공유하며 인재 양성을 지원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SK는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지식경영을 학술 영역에서 비즈니스 현업의 통찰력과 접목해 경쟁력 강화로 이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