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後 풍요가 부른 록의 전성기, 그 시대를 빛낸 '전설'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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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18) '록의 전설' 제프 벡을 추모하며
로큰롤을 '저항의 음악'이라고 하지만
戰後 경제 급성장에 삶 윤택해져 등장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된 청년들 열광
늘 새로운 스타일 추구한 기타리스트
제프 벡 '音의 감옥' 탈출에 평생 바쳐
(18) '록의 전설' 제프 벡을 추모하며
로큰롤을 '저항의 음악'이라고 하지만
戰後 경제 급성장에 삶 윤택해져 등장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된 청년들 열광
늘 새로운 스타일 추구한 기타리스트
제프 벡 '音의 감옥' 탈출에 평생 바쳐
제프 벡이 세상을 떠났다. 누구요? 하는 분이라면 이번 칼럼은 통과하십사 공손하게 부탁드린다. 록 음악과 일렉트릭 기타를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이 글은 외계 언어로 도배된 지면 낭비다. 그러나 매체들이 ‘전설의 기타리스트’니 ‘세계 3대 기타리스트’니 하는 공허한 헌사로 그의 죽음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대로 된 추모의 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의무감에 더해 음악사도 역사라는 다소 빈약한 핑계로 신문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지면을 전용(轉用)하니 이 또한 양해를 구한다.
흔히 로큰롤을 저항의 음악이라고 한다. 하나만 아는 소리다. 로큰롤은 풍요의 산물이다. 전쟁이 끝난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경제는 37%나 성장했고 북아메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아이들은 더 신나게 이 풍요를 즐기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선택지는 지루한 스탠더드 팝과 고루한 컨트리뿐이었다. 재즈도 있었잖아? 모차르트와 아프리카를 잇는 다리라는 멋진 수사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기본적으로 춤곡이 아니다. 이때 발명된 게 로큰롤(rock’n’roll)이었고 가장 유력한 조력자가 악기 제조사 펜더와 깁슨이 1950년대 중반 출시한 일렉트릭 기타였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베이스 드럼의 쿵쿵 찧는 소리에 짱짱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가 올라타는 순간 젊은이들은 환장했다. 오리걸음 연주자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우상이 됐다.
미국에서 탄생한 로큰롤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그들의 북대서양 동맹국인 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영국 역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일자리가 넘쳐나 ‘황금시대’라고 불렸던 그 시기 영국인들의 실질소득은 40%나 증가했다.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된 젊은이들은 클럽으로 몰려갔고 그곳에는 나중에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게 될 음악적인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틀스는 소녀 팬들을 떼로 기절시켰다. 롤링 스톤스는 기절은 안 시키는 대신 계속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 클럽 주인들을 난감하게 했다. 완성도가 높아진 영국의 로큰롤은 이제 원조였던 미국 음악 시장을 역공한다. 1964년 비틀스가 존 F. 케네디공항에 내렸을 때 미국 주간지 라이프는 이렇게 적었다. “1783년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었다. 지난주 비틀스는 그곳을 되찾았다.”
로큰롤의 사운드는 점차 거칠어진다. 앰프 볼륨을 끝까지 올리면 스피커는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지른다. 이때 고막을 찢는 소음이 발생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 팬들은 이 소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예 이 소리를 탑재한 페달(기타 사운드를 바꿔주는 전기 장치)이 개발되면서 로큰롤은 거추장스러운 수사를 떼고 록(rock)으로 재탄생한다. 신(神)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인재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다. 영국, 미국에서 다양한 록밴드가 출현했고 죄다 기량이 출중해 이때를 록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르네상스의 세 주인공이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제프 벡이었다. 세 사람이 결성한 밴드와 음반만으로도 르네상스의 절반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의 음악적 성취는 압도적이다.
1970년대 말 르네상스가 끝났을 때 이들의 행로는 완전히 갈린다. 에릭 클랩튼이 통기타를 치며 발라드를 부른 끝에 자신의 존재 기반이었던 ‘레일라(layla)’를 뽕짝으로 전락시키고 지미 페이지가 1980년 레드 제플린 해산 이후 행적이 묘연한 가운데 제프 벡만 수도승처럼 정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스타일을 40년째 반복한 사람을 거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내내 다른 패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다.
서양의 7음계, 반음까지 더해서 12음계는 음의 감옥이다. 여기에 있는 음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세상에는 없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피아노 건반의 미와 파 사이에는 악보로 옮길 수 없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프 벡은 흔히 ‘스케일’이라고 부르는 그 음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기타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펜더 기타에 장착된 암(arm)이라는 쇠막대를 이용해 줄의 장력을 낮추고 올리는 동안 악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음들로 이뤄진 오묘한 선율이 탄생했다.
음악은 결국 음(音), 소리다. 새로운 소리를 얻기 위해 제프 벡은 피크 대신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만졌다. 꼬집고 때리고 쓰다듬어 만든 그의 소리에는 감정이 묻어 있다.
제프 벡은 작년에도 신보를 냈다. 왕년의 스타가 노후 대책으로 우려먹는 앨범이 아니다. 팬들은 이번에는 또 어떤 소리일까 궁금해하며 그의 앨범을 구입한다. 오랜만에 제프 벡의 대표곡 ‘우리는 연인으로서는 끝난 까닭에’와 ‘나디아’를 듣는다. 촉촉하고 영롱한 소리가 귓가에 머물다 흩어진다. 이제껏 그렇게 기타를 연주한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제프 벡에서 진화를 멈췄다. 잘 가요 제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남정욱 작가·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흔히 로큰롤을 저항의 음악이라고 한다. 하나만 아는 소리다. 로큰롤은 풍요의 산물이다. 전쟁이 끝난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 경제는 37%나 성장했고 북아메리카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아이들은 더 신나게 이 풍요를 즐기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선택지는 지루한 스탠더드 팝과 고루한 컨트리뿐이었다. 재즈도 있었잖아? 모차르트와 아프리카를 잇는 다리라는 멋진 수사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기본적으로 춤곡이 아니다. 이때 발명된 게 로큰롤(rock’n’roll)이었고 가장 유력한 조력자가 악기 제조사 펜더와 깁슨이 1950년대 중반 출시한 일렉트릭 기타였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베이스 드럼의 쿵쿵 찧는 소리에 짱짱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가 올라타는 순간 젊은이들은 환장했다. 오리걸음 연주자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우상이 됐다.
미국에서 탄생한 로큰롤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그들의 북대서양 동맹국인 영국이었다.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영국 역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일자리가 넘쳐나 ‘황금시대’라고 불렸던 그 시기 영국인들의 실질소득은 40%나 증가했다.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된 젊은이들은 클럽으로 몰려갔고 그곳에는 나중에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게 될 음악적인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비틀스는 소녀 팬들을 떼로 기절시켰다. 롤링 스톤스는 기절은 안 시키는 대신 계속 오줌을 지리게 만들어 클럽 주인들을 난감하게 했다. 완성도가 높아진 영국의 로큰롤은 이제 원조였던 미국 음악 시장을 역공한다. 1964년 비틀스가 존 F. 케네디공항에 내렸을 때 미국 주간지 라이프는 이렇게 적었다. “1783년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었다. 지난주 비틀스는 그곳을 되찾았다.”
로큰롤의 사운드는 점차 거칠어진다. 앰프 볼륨을 끝까지 올리면 스피커는 견디지 못해 비명을 지른다. 이때 고막을 찢는 소음이 발생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 팬들은 이 소리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예 이 소리를 탑재한 페달(기타 사운드를 바꿔주는 전기 장치)이 개발되면서 로큰롤은 거추장스러운 수사를 떼고 록(rock)으로 재탄생한다. 신(神)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인재를 쏟아붓는 경향이 있다. 영국, 미국에서 다양한 록밴드가 출현했고 죄다 기량이 출중해 이때를 록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르네상스의 세 주인공이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그리고 제프 벡이었다. 세 사람이 결성한 밴드와 음반만으로도 르네상스의 절반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의 음악적 성취는 압도적이다.
1970년대 말 르네상스가 끝났을 때 이들의 행로는 완전히 갈린다. 에릭 클랩튼이 통기타를 치며 발라드를 부른 끝에 자신의 존재 기반이었던 ‘레일라(layla)’를 뽕짝으로 전락시키고 지미 페이지가 1980년 레드 제플린 해산 이후 행적이 묘연한 가운데 제프 벡만 수도승처럼 정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똑같은 스타일을 40년째 반복한 사람을 거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내내 다른 패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다.
서양의 7음계, 반음까지 더해서 12음계는 음의 감옥이다. 여기에 있는 음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세상에는 없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피아노 건반의 미와 파 사이에는 악보로 옮길 수 없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프 벡은 흔히 ‘스케일’이라고 부르는 그 음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기타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펜더 기타에 장착된 암(arm)이라는 쇠막대를 이용해 줄의 장력을 낮추고 올리는 동안 악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음들로 이뤄진 오묘한 선율이 탄생했다.
음악은 결국 음(音), 소리다. 새로운 소리를 얻기 위해 제프 벡은 피크 대신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만졌다. 꼬집고 때리고 쓰다듬어 만든 그의 소리에는 감정이 묻어 있다.
제프 벡은 작년에도 신보를 냈다. 왕년의 스타가 노후 대책으로 우려먹는 앨범이 아니다. 팬들은 이번에는 또 어떤 소리일까 궁금해하며 그의 앨범을 구입한다. 오랜만에 제프 벡의 대표곡 ‘우리는 연인으로서는 끝난 까닭에’와 ‘나디아’를 듣는다. 촉촉하고 영롱한 소리가 귓가에 머물다 흩어진다. 이제껏 그렇게 기타를 연주한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제프 벡에서 진화를 멈췄다. 잘 가요 제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남정욱 작가·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