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새해가 밝아왔다. 2023년 계묘년 토끼의 해 새 아침은 7시26분 바다 밖에 지은 국토의 솟을대문 독도가 먼저 더 크고 더 밝은 해를 받아 올렸다.

우리 겨레는 해를 좇아 동녘 땅 백두대간에 처음 보금자리를 튼 ‘밝(ㅸㆍㄺ)’은 나라 빛의 겨레였다. 하여 오랜 역사 더불어 오롯이 한 핏줄 이어왔으며 하늘이 내린 빼어난 슬기와 끊이지 않는 부지런함으로 아름답고 눈부신 전통과 문화를 일구며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 스스로 문명국이라 뽐내던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비로소 한국이 어떤 나라이며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인류의 눈과 귀와 가슴에 심어주게 되었다.

해의 나라, 빛의 겨레

[신년 에세이] 다시 날자, 겨울나무도 언 땅에 뿌리 박고 꽃 장만 한창이니!
돌아보면 긴 겨울이 있었고 깊은 어둠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몰아닥친 약육강식의 칼바람은 우리에게도 닥쳐와 서른여섯 해 동안 나라를 빼앗긴 모진 고통과 치욕을 겪어야 했고 나라 찾기에 바쳐진 형극이며 희생이며 헌신은 또 무엇으로 값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땅의 시인들은 다투어 겨울 속의 봄을 노래했으니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 보다”며 온몸으로 봄의 신명을 불러냈었고, 이육사는 ‘절정’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며 결코 꺾이지 않는 빛의 사닥다리를 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저 먼 이국땅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모국어와 한글로 시 쓰기에 목숨의 기름을 다 태우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육필로 남기고 모국어에 순교한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로 나는 비록 땅속에 묻히더라도 기어코 자랑스러운 내 나라의 봄, 모국어의 봄이 올 것을 밝혀주고 있다.

내 나라는 시로 해가 뜨고 시로 달이 지는 나라였다. 시로 농사짓고 길쌈하고 시로 나라 살림하는 나라였다. 어찌 나라가 빛을 잃었을 때 시로 등불을 밝히지 않을 수 있으랴. 500년 고려 왕업을 한몸에 지고 목숨과 바꾼 정몽주의 ‘단심가’가 그렇고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가 꺾일 때 민영환이 자결한 칼과 옷에서 대나무가 솟아올라 대구여사를 비롯한 온 백성들이 부른 ‘혈죽가’가 그러했다.

한국은 왜 해의 나라 빛의 겨레인가. 먼 조상 때부터 하늘의 해와 달을 우러러 영고무천(迎鼓舞天) 노래하며 춤을 추었으니 인도의 시인으로 아시아에서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1861~1941)가 1929년 4월 동아일보 기자에게 써준 헌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불 밝힌 하나의 등잔이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동녘 나라의 밝은 빛이 되리라”에서 이미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세계 속의 해보다 밝은 빛의 나라를 예시하고 있던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 열매 많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 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 내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용비어천가 제2장)

세종 임금은 기득권 세력인 한자 문화에 익숙한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기 한 해 전인 1445년 손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고, 이병기는 ‘세종대왕의 국문학’(1954. 10. 9. 삼남일보)에 발표했다. 세종실록에는 정인지, 권제, 박팽년 등이 짓고 세종은 용감(龍龕)만 했다고 적혀있으나 육대조의 사적을 칭송하는 글을 손수 지었다 함이 면구하여 그리 적은 것이지 세종이 지은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세상에 아직 내놓지도 않은 글자로 시를 짓다니! 더욱 이 ‘제2장’은 한문 투가 하나도 없는 알토란 같은 우리말로만 지었는데 이 두 시구 속에 담긴 뜻은 600년이 되어도 하나도 낡지 않으며 앞으로 또 몇천 년이 흘러도 날로 더욱 새로워질 만큼 깊고 넓다. 뿌리 깊은 나무는 곧 한글이고 한글은 어떤 외세의 침략도 외국어의 범람에도 흔들림 없이 오히려 눈부신 꽃으로 피고 다디단 열매로 익어가고 있다.

그래서 한글이다. 1886년 고종 황제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온 스물세 살 미국 청년 호머 헐버트(1863~1949)는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한국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지었고 1913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중국인의 문맹을 걱정하는 말을 듣고 한글을 가져다 쓰라고 권한다. 그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청인(淸人)들이 우리 글자를 가져다 쓴다니 참 정묘한 일이다”고 글까지 쓴다.

문명비평서 <총·균·쇠>에 이어 2020년 <대변동>을 쓴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대변동>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글이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문자임을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한국은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를 만든 나라이니까”라고 역설한다.

그룹 BTS, 영화 ‘기생충’ ‘미나리’, 드라마‘오징어 게임’ 등으로 한국이 문화예술의 나라이고 한국인이 뛰어난 예술 민족이라는 것과 더불어 한글 알기, 한글 배우기에 지구촌이 들썩이고 있다. 전 세계 방방곡곡에 한글학교인 ‘세종학당’이 2021년 기준 82개국 234곳에 열려 있으며 팬데믹 상황에도 신청 국가가 늘어나는데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재정분석가 짐 로저스는 “세계의 젊은이들이여 한국에 투자하라”고 외치고 있을까.

“용을 타고 하늘을 난다”는 용비어천가의 용은 이제 와 보면 곧 ‘한글’이고, 한글을 타고 지구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이는 곧 우리 한민족이 아닌가. 한글은 샘이 깊은 ‘물’이니 겨레를 살찌우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무량한 자원으로 다섯 바다와 여섯 뭍을 꽃 피우고 새 우는 낙원을 이룰 것이다.

하늘이 내린 신의 솜씨

이만한 축복, 이만한 은총이 어디 있으랴. 우주를 다 가리고도 남을 어머니 나라 말씀이 있고, 귀신들도 깜짝 놀라 꽁무니를 뺄 하늘의 솜씨를 타고난 우리가 아니더냐. 하여 선사시대 암각화며 고구려 벽화, 석굴암 대불, 첨성대, 백제 금동화로,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고려청자, 조선백자, 훈민정음 창제…. 이 휘황찬란한 예술 문화 창달에 더하여 참으로 불가사의한 벼루 조각의 신천지를 여는 ‘위원화초석일월연(渭原花艸石日月硯)’을 낳은 것이다.

조선왕조가 창건하던 해인 1392년 궁궐 경내에 왕실에서 쓰는 종이, 붓, 먹, 벼루 등 문방구를 제작 헌납하던 액정서(掖庭署)를 세운다. 이때 왕조의 융성과 백성의 복락을 염원하는 길상(吉祥)의 신품(神品) 벼루가 탄생했으니, 압록강 지류 위원강(渭原江) 깊은 물 속에서 캐낸 녹두색과 팥색이 층을 이룬 화초석(花草石)에 해를 연면(硯面)으로 달을 연지(硯池)로 앉히고 둘레에 땅과 하늘 잇는 삼라만상을 조탁(彫琢)한 것이다.

이색(李穡)이 <목은집>에 쓴 십장생시(十長生詩)의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불로초, 거북, 학, 해, 달을 넘어서 용, 호랑이, 소, 원숭이, 사슴, 봉황, 잉어, 오리, 개구리, 토끼, 두꺼비를 비롯해 풀벌레들과 포도, 국화, 난초, 연꽃 속에 낚시하고 술잔 들고 뱃놀이하고 농사짓고 거문고 타는 모습까지 모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 벼루의 제작연대를 입증하는 것은 개국공신 황희(黃喜, 1363~1452)의 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과 역시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벼루(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가 모두 위원화초석일월연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벼루의 종주국으로 불리는 중국의 당(唐) 송(宋) 명(明)의 어느 왕실 벼루도 조각이나 예술성에서 따라오지 못하는 새 경지를 조선은 창조해내었을까. 이는 벼루가 먹을 가는 문방도구를 넘어 우리 겨레가 지향하는 신앙적 이상세계의 상징물이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높고 먼 형이상학으로 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위원화초석일월연이 눈 부릅뜨고 호령하고 있다고 하겠으며, 미켈란젤로도 해내지 못한 이 조각 작품은 겨레의 가슴에 빛나는 해가 되고 달이 되리라.

봄 신명 불붙듯 희망의 노래를

“보릿고개”란 말 지금은 잊히고 있지만 50년 전만 해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넘던 어머니들의 눈물고개였다. ‘한강의 기적’이 있었다. 끊어진 한강 다리가 무지개로 솟아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독 광부, 중동 노동자에, 월남 파병 아버지들의 피와 땀이 놓은 다리였다. 그렇게 지구촌의 하나 남은 분단의 나라에서 서울올림픽을 열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4강 신화를 만들고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은 세계의 첫째를 다투고 있다.

광복 때 나라가 두 동강만 나지 않았더라면 해의 나라 한국은 아시아의 등불이 아닌 세계의 태양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허나 아니다. 반쪽으로 이만큼 일어섰으면 더 당당하고 더 자랑스럽지 않은가. “내 어머니가 레프라(문둥이)일 망정 그러나 나는 결코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다. 조국도 마찬가지다”라고 김소운은 한창 동족상쟁이 치열하던 1951년 8월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에 부치는 편지’라는 부제를 붙인 ‘목근통신(木槿通信)’을 국제신보에 썼다. 그런가 하면 성찬경은 시 ‘추사의 글씨에게’에서 “너를 키운 한국이란 물, 한국이란 땅, 한국이란 바람은 너의 천둥 같은 나래 소리로 해서 길이 멀리 떨칠 자랑을 한다”고 했다.

2019년 중국국가전시회에서 ‘추사 김정희 전시회’가 열리자 중국의 서예가들이 운집해 왕희지(王羲之)에게나 씌우던 서성(書聖)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추사뿐이랴. 해와 달의 땅에 태어난 우리, 한국이란 땅의 정기를 받아 “천둥 같은 나래 소리로 길이 멀리” 떨치지 않겠는가.

일어서자, 달려 나가자, 노래하자, 겨울나무는 긴 겨울 땅속에 뿌리를 박고 희고 노랗고 붉은 꽃 장만에 한창 바쁘리라.

오래 참고 견뎌 온 얼굴 가리개도 활짝 벗어던지고 이태원에서 어이없게 산화한 딸, 아들들에게 쏟아내던 눈물도 거두고 이상화의 시처럼 봄 신명에 불붙어 노래하자. 날아오르자. 희망의 한국을, 해보다 더 밝은 우리의 내일을!

이근배 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