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23일 내놓은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대책이 시행되면서 채권시장이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지만 여전히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자금경색이 지방자치단체발 신용 위기에서 촉발된 만큼 단순히 유동성을 지원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우량 기업을 선별해 신용을 보다 촘촘하게 보강해주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50조원+α’ 규모 유동성 공급 대책의 하나인 채권시장안정펀드(20조원) 자금이 이날부터 채권시장에 풀리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코로나19 위기 때 조성해 아직까지 집행하지 않고 남아 있던 1조6000억원이 이날부터 채권시장에 투입됐다”며 “국공채나 은행채보다 상대적으로 자금 사정이 급한 우량 회사채 등을 우선순위에 놓고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20조원까지 자금을 확충하기 위해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84개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캐피털 콜’(펀드 자금 요청)도 이날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금융당국으로부터 채안펀드 조성을 위한 분담금을 납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당국과 협의해 구체적인 규모와 투입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대책이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근본적인 신용 위기를 해소하는 데는 역부족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 담당 펀드매니저는 “국공채가 강세를 보이면서 금리가 다소 하락했지만 여신전문금융회사채 등은 연 6%가 넘는 고금리 부담 탓에 발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강원도가 돈이 없어서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지급보증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한 게 아니듯 현재 채권시장에서도 주로 국공채와 은행채에 자금이 쏠리는 신용 위기 현상이 뚜렷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멀쩡한 기업들도 유동성이 마르면서 ‘흑자 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 대기업 재무담당 임원은 “정상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우량 기업들까지 운전자금을 구하지 못해 부도를 맞는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금융당국이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 개선) 등의 제도를 선제적으로 검토해 기업 옥석을 가리는 작업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신관호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도 “기본적으로 유동성 위기와 신용 위기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며 “정부의 유동성 공급 대책이 자칫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한계기업을 구제하는 데 활용되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 감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