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헌트 영국 신임 재무장관이 리즈 트러스 총리가 내놓은 감세안을 대부분 철회할 것이라고 17일 밝혔다. 무리한 감세 탓에 영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에 혼란이 증폭돼서다. 정책이 번복되자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내년 영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춰 잡았다. 경제 혼란을 일으킨 트러스 총리는 실각 위기에 몰렸다.

감세안 또 철회한 英

헌트 신임 재무장관은 이날 내년 4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던 소득세 기본세율을 20%에서 19%로 인하하는 방안을 취소하고 경제 여건이 나아질 때까지 무기한 보류한다고 밝혔다. 배당세 및 관광 부가가치세 인하 정책, 주세 동결 계획 등도 모두 철회됐다. 보편적 에너지 요금 지원은 2년에서 6개월로 단축할 예정이다.

이미 영국 의회를 통과한 주택 취득세율 인하와 국민보험 분담금 비율 인상 취소 결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에너지 요금 상한 동결은 내년 4월 이후 재검토할 예정이다. 영국 재무부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트러스 총리가 내놓은 연 450억파운드(약 73조원) 규모의 감세안 가운데 철회된 정책 규모는 연 320억파운드(약 52조원)에 달한다.

헌트 장관은 “어떤 정부도 시장을 통제할 수 없고 공공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줘야 한다”며 “정부는 경제 안정에 책임이 있으며 감세를 위해 나랏빚을 지는 건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트러스 총리가 내놓은 경제 공약이 사실상 철회됐다는 분석이다. 이날 블룸버그는 헌트 장관의 발표를 두고 “현대 영국 정치에서 전례 없는 유턴”이라며 “트러스의 ‘미니 예산안’은 너덜너덜해졌다”고 지적했다.

오락가락하는 재정정책에 경제 전망은 악화했다. 전날 블룸버그는 골드만삭스가 16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4%에서 -1%로 낮췄다고 보도했다.

성장 전망을 낮춘 건 트러스 총리의 감세 정책이 잇달아 철회됐기 때문이다. 그는 내년부터 법인세율을 기존 19%에서 25%로 올리기로 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지난달 23일 발표했다. 하지만 이달 14일 헌트 장관은 이를 그대로 시행한다고 밝힌 지 사흘 뒤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도 철회했다.

3일 고소득자 감세안을 철회한 데 이어 지금까지 정책을 세 차례 번복했다. 계속된 번복에 정책 신뢰도가 떨어졌다. 보고서는 “성장 모멘텀 약화, 내년 4월 법인세 인상 등을 감안했다”며 “내년에 더 심각한 경기 침체가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가격 하락)하자 부동산 시장과 기업 활동에도 제동이 걸렸다. 로이터에 따르면 이달 들어 영국 부동산 호가는 전년 동기 대비 7.8% 올라 올 1월 이후 가장 낮은 상승률을 보였다. 영국 금융회사들이 모기지 금리를 올리고 대출을 중단한 여파다.

트러스 총리는 실각 위기

英 감세안 사실상 폐기…트러스 '최단명 위기'
영국 현지에서는 트러스 총리가 수일 내 축출될 수 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여당인 보수당이 그가 감세 기조를 굽히지 않을 때부터 비판해온 데다 지지율 위기감도 커져서다.

타블로이드지는 보수당 의원 100명 이상이 보수당 평의원 모임인 ‘1922위원회’의 그레이엄 브레이디 위원장에게 트러스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요청하는 서한을 이번주 제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지난 보수당 경선에서 트러스 총리 경쟁자였던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을 지지했던 보수당 중진 의원들이 17일 멜 스트라이드 전 재무장관과 만난다고 보도했다. 스트라이드 전 장관은 감세안을 비판해온 인사다.

보수당은 지지율 하락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 여론조사업체 오피니움이 최근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금 총선이 치러지면 노동당이 하원 의석 중 411석을 얻어 12년 만에 정권을 탈환할 전망이다. 보수당은 현재 의석(356석) 가운데 219석을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6일부터 임기가 시작된 트러스 총리가 물러날 경우 영국 역사상 최단 기간 재임한 총리가 된다. 기존 기록은 1827년 취임 119일 만에 병사한 조지 캐닝 전 총리다.

노유정/오현우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