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미중 4자 평화회담으로 평화체제 전환 과정 시작해야"…자서전 발간 "김정일 감상적·김정은 이성적…고위급회담 때 北대표 南유행가 불러 놀라"
일제 강점과 해방, 6·25전쟁과 피란,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자주국방정책의 성안, 신군부에 의한 강제전역과 외교관의 길, 남북고위급회담에서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통일일꾼까지. 1933년 지금은 북한 땅인 평안북도 위원읍에서 태어나 내년이면 구순을 맞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이어 이번엔 자서전 '다시, 평화'(폴리티쿠스)를 내놓았다.
굴곡진 한반도 현대사를 오롯이 겪으며 군인으로, 외교관으로, 대북협상가로, 전략가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담았다.
임 전 장관은 책을 발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우리 민족이 살아온 지난 한 세기는 실로 격동의 역사였고 남이 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6·25전쟁 때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먹고 잘 곳을 구하려고 미군 부대에서 총기를 닦고 창고를 하는 허드렛일을 하던 그는 '돈이 없어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64년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분란대책 과정을 밟은 일을 '군인 임동원'의 터닝포인트로 기록했다.
"그곳에서 민족해방전쟁을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할지에 대해 전략적으로 연구했다"며 "그런데 마침 육사에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과목이 생겨 교수로 취임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1967년 임 전 장관은 미국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혁명전략과 대공전략'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1·21청와대 기습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책은 군뿐 아니라 정보기관, 경찰에서도 필독서가 됐다.
그는 "당시 책에서 제시한 향토예비군 창설, 게릴라 퇴치를 위한 특수전여단 증설, 시민증이나 도민증이 아닌 전국적으로 확인 가능한 주민등록증 발급 등을 자문했다"며 "나는 지금도 주민등록증을 사용할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군인 임동원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1970년 이스라엘 국방제도시찰단 참여였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의 자주국방노선을 직접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고 이후 당시에는 '양로원'으로 불리던 합동참모본부로 자리를 옮겨 중장기 국방력 건설계획인 '율곡계획'의 성안과 방위세 신설을 주도했다.
임 전 장관은 "율곡사업을 지속해 처음에는 소총을 바꾸고 탄약을 생산하는 정도에서 전차, 잠수함, 구축함도 우리가 만들고 전투기 조립생산도 가능해졌다"며 "요즘 다른 나라에서 K9자주포나 K2 전차, 경전투기 등을 수입해간다는 뉴스를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임 전 장관의 군인으로서 인생 1막은 막을 내렸다.
그는 자서전에서 "갑작스럽게 군을 떠나야 하는 충격이 컸다"며 "전화위복이 될 줄 모르고 몹시 섭섭한 마음으로 군을 떠났다"고 당시 착잡했던 심정을 회고했다.
임 전 장관은 나이지리아 대사로 부임하면서 7년간 현장에서 외교관으로의 길을 걸었다.
이어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고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의 표현대로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그는 자서전에서 노 전 대통령이 "내 나라를 잘 알고 애국심이 강한 '국적 있는 외교관' 양성을 위한 제도를 확립하라고 지시했다"며 현재의 국립외교원이 서초동에 자리를 잡는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1990년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게 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더 좋은 적임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며 회담 대표로 직접 지명했다.
임 전 장관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임명은 내 일생의 진로를 군인, 외교관에서 통일일꾼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고위급회담 때 숨은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1992년 5월 신라호텔에서 열린 7차 회담. 당시 북측 대표인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1차 회담 때부터 졸라온 '기생집' 방문을 위해 호텔에 가라오케가 차려졌고 연형묵 북한 총리는 남쪽의 유행가인 '열일곱살이예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 등을 불러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적었다.
당시 회담 대표였던 김영철 현재 당 통일전선부장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백두산'이라는 시를 읊어 분위기를 깨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임 전 장관은 자서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 첫 정상회담을 성사해 가는 과정 등 이른바 '햇볕정책 전도사'로서 당시 남북관계 임했던 마음가짐 등도 상세히 담았다.
2018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에 이어 9월 평양정상회담에 동행하면서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까지 북한의 '김씨 3대'를 모두 만난 소회도 피력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그가 감상적인 자기 부친과 달리,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끝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해법으로 "미국과 북한이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북미관계 정상화와 비핵화, 정전 상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에 더해 남북관계 개선이 한반도 문제의 4대 핵심과제"라며 "남북, 한미, 북미가 합의하고 중국도 동의한 '4자 평화회담'을 개최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임동원 전 장관은 오는 19일 오전 여의도 63컨벤션센터 별관 4층 라벤더&로즈마리홀에서 자서전의 출판기념회를 한다.
정부는 미국 에너지부(DOE)가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CL)’에 올린 데 대해 “외교정책상의 문제가 아니다”고 17일 밝혔다. 미 에너지부가 한국을 SCL에 포함했다고 확인한 지난 15일 이후 한국 내 핵무장론 확산, 비상계엄 선포 및 대통령 탄핵소추 등 그 이유를 놓고 다양한 추측이 나왔지만 결국은 다른 문제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정부가 SCL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연구소 보안 문제가 이유”외교부는 이날 출입기자단에 보낸 공지를 통해 “미국 측을 접촉한 결과 미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 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미국 측은 이 리스트에 등재되더라도 한·미 간 공동연구 등 기술협력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측은 외교부에 한국 연구원들이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등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보안 규정을 어긴 사례가 적발돼 명단에 포함됐다는 취지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다른 정부 고위 관계자도 “미 국무부에 (민감국가 관련 사항을) 물어봤을 때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고, 미 에너지부에서 접촉 가능한 고위직은 대부분 사안을 모르고 있었다”며 “미국 에너지부 고위직이 아니라 실무진이 SCL에 한국을 추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미 에너지부는 지난 1월 초 한국을 SCL에 추가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15일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유나 배경과 관련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 외교부 역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외교가
17일 정부는 미국 에너지부(DOE)가 한국을 민감국가 리스트에 포함한 것에 "외교정책상 문제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외교부는 이날 오후 출입기자단에 보낸 공지를 통해 "미측을 접촉한 결과, 외교정책상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 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이어 "미측은 동 리스트에 등재가 되더라도 한미간 공동연구 등 기술협력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확인했다"고 강조했다.미국 측은 한국 연구원들이 DOE 산하 연구소 등에 출장이나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보안 규정을 어긴 사례가 적발돼 명단에 포함됐다는 취지로 외교부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앞서 DOE는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이던 지난 1월 한국을 '민간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에 올렸지만, 그 배경에 대해선 그동안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외교부는 "과거에도 한국이 미 에너지부 민감국가 리스트에 포함됐다가, 미측과의 협의를 통해 제외된 선례가 있다"고 덧붙였다.미 회계감사원(GAO) 보고서 등에 따르면 한국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DOE의 민감국가 명단에 올라 있다가 1993년 제1차 한미 과기공동위원회에서 한국 측의 시정 요구와 국내외 정세 변동을 계기로 1994년 7월 해제됐다.정부는 다음 달 15일 발효 전 한국이 민감국가 명단에서 빠질 수 있도록 이번에도 미국 측과 적극적으로 협의한다는 방침이다.이보배 한경닷컴 객원기자 newsinfo@hankyung.com
방위사업청이 17일 한국형차기구축함(KDDX) 사업자 선정 관련 분과위원회를 열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방사청은 이례적이지만 다음 달 2일 예정된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 전 다시 한번 분과위원회를 개최해서라도 매듭을 짓겠다는 방침이다.방사청은 이날 분과위 회의를 주재하고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 방식 등을 심의했지만 논의 결과 모든 안건의 처리가 보류됐다. KDDX는 총사업비 7조8000억원의 국산 구축함 프로젝트로 오는 2030년까지 100% 국내 기술로 6000톤급 군함을 6척 건조하는 사업이다.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는 KDDX의 사업입찰 윤곽은 이번 분과위에서 드러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수의계약으로 사업 방식이 결정될 경우 개념설계와 기본설계를 수행한 HD현대중공업이 유리하다는 평가다. 방사청 개청 이래 19차례 함정 설계에서 충무공이순신함을 제외하곤 모두 기본설계를 한 업체가 상세설계를 맡았다.반면 경쟁입찰로 진행될 경우 HD현대중공업(-1.8점)과 달리 보안 감점이 없는 한화오션이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입찰 방식을 놓고 두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각에선 선도함 1척을 제외한 후속함 5척을 1, 2순위 업체에 각각 3·2척씩 배분하는 공동 개발 및 종합발주 방식도 검토 대상에 올랐다.방사청이 이날 수의, 경쟁, 공동 개발 등 다양한 입찰 방안을 논의했지만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이에 따라 공은 이례적으로 다음 분과위 회의로 넘어가게 됐다. 방사청 관계자는 "논의 결과 구체적인 안건 내용과 분과위 의사결정 결과는 방위사업업 제6조 청렴서약제도에 따라 방추위 최종 의결 전까지 공개하지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