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집회·삭발시위에 논까지 갈아엎지만 '속수무책'
쌀소비 촉진도 '한계'…"적극적인 공급량 조절 대책 마련해야"
'쌀값 바닥'에 수확 코앞에 두고 바짝 타들어 가는 '농심'
"이건 값이 내려가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거예요.

22만원짜리가 몇 개월 만에 16만원이 됐는데 다음달 부터 수확할 햅쌀은 어떻게 될지 답답합니다.

"
가을 햅쌀 수확을 코앞에 둔 쌀 재배 농가들의 불안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 쌀값 폭락은 2021년산 쌀을 사들여 저장해놓고 판매하는 미곡종합처리장(RPC)에 직격탄이 됐는데, 이제는 햅쌀을 수확해 팔아야 하는 농가들에도 눈앞의 공포가 됐다.

폭락하는 쌀값을 어떻게 해서든 잡아보려고 민관이 함께 온갖 대책과 아이디어를 쏟아냈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쌀값은 맥없이 추락하고만 있다.

양곡 재배유통 전문가들은 쌀값 안정을 위한 단기 대책도 중요하지만 쌀 공급량 조절과 소비 증가라는 근본적인 수급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쌀값 바닥'에 수확 코앞에 두고 바짝 타들어 가는 '농심'
◇ 마지노선 무너뜨리고 더 추락…재고도 작년의 2배
'바닥을 모르겠다'는 말은 2021년산 쌀값에 딱 맞는다.

2021년산 산지쌀값(80㎏)은 지난해 10월 22만7천원까지 올랐었다.

최근 5년 평년가격인 18만8천원보다 약 3만원 이상 높게 거래됐는데, 2010년 이후 가장 높은 가격이었다.

연도별 가격 현황을 보면 2021년산 쌀값이 유독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13만원선에서 17만원선을 오르내리던 쌀값은 2019년 19만1천원으로, 2020년 19만2천원으로 뛰더니 2021년 22만원으로 치솟았다.

작년 연말까지도 21만원선을 유지하던 쌀값은 생산량·재고미 증가가 겹치면서 올해 초부터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부의 쌀 추가 수매도 내려가는 쌀값을 막지 못했으며, 올해 6월 말에는 평년가격인 18만원선이 무너졌다.

'마지노선'이라던 18만원선 붕괴에도 쌀값은 하락세를 멈추지 않았고 이달 중순 17만원선까지 깨졌으며 이달 25일 현재 16만원대로 주저앉았다.

저렴한 쌀값은 쌀소비 증가를 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재고미가 더 쌓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농협의 재고 폭증은 창고 저장공간 부족으로 인한 신곡 수매 대란과 가격 하락에 따른 쌀 농가 소득 감소 우려까지 낳고 있다.

지난달 기준 전국 농협 RPC에 쌓여 있는 재고쌀은 42만8천t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의 23만7천t보다 거의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전국 549곳 쌀 수매 농협 중 올해 7월 기준 전년 대비 재고 보유량이 50% 이상 증가한 농협은 161곳으로 전체의 29%에 달한다.

전남농협본부 양곡유통 담당자는 "민간 RPC 보유량까지 합할 경우 재고미는 이를 훨씬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며 "재고미 가격이 오를 기미가 없어 수확을 앞둔 2022년산 햅쌀 가격에도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쌀값 바닥'에 수확 코앞에 두고 바짝 타들어 가는 '농심'
◇ 거리로 뛰쳐나온 '불안한 농심'…도심 집회에 삭발시위까지
급락한 쌀값은 올해 초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현상인 만큼 지난해 가을 이미 수매를 끝낸 쌀 농가보다는 RPC에 치명타가 됐다.

하지만 떨어진 쌀값이 오를 줄 모르고 2022년산 햅쌀 수확기까지 이어지자 이제는 농민들도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됐다.

농자재와 원자재 가격 급등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고 농민들도 도심 집회와 삭발 시위로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햅쌀 수매를 위해서는 구곡이 쌓여있는 쌀 창고를 비워야 하는데, 재고미 처리를 위해 지금보다 떨어진 헐값에 구곡이 시장에 나올 수 있고 이는 햅쌀 가격까지 끌어내릴 것이란 우려도 있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영암군협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영암농민회, 전국 쌀생산자협회 영암군지부 소속 회원 200여명도 지난 26일 전남도청 앞에서 쌀값 폭락 항의 집회를 열고 "햅쌀가격을 위협하는 창고에 쌓여 있는 구곡을 즉각 시장 격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농연·전농 등 농민단체들도 지난 29일 오후 서울역 인근에서 농민 총궐기 대회를 열고 정부의 늑장 대응과 미온적 대처를 쌀값 폭락의 원인으로 지목했으며, 지난 19일 전북 김제시에서는 쌀값 하락과 재고 폭증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농민들이 수확을 앞둔 논 1필지(4천㎡)를 갈아엎기도 했다.

농민들은 영농비는 치솟았는데 쌀값이 지난해보다 떨어진다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철원 민통선 안에서 쌀농사를 짓는 장모(52)씨는 "비료, 면세유, 인건비 등은 물가 인상과 함께 오를 대로 올랐는데 햅쌀 가격이 지난해보다 떨어진다면 이는 곧 농사를 포기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쌀값 바닥'에 수확 코앞에 두고 바짝 타들어 가는 '농심'
◇ 한 톨이라도 쌀소비 늘리자…수출까지 총력 대응
쌀값 하락에 대한 걱정이 쌓이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쌀소비를 늘려 재고미를 줄이고 가격하락도 막아보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전북농협 등 전국의 농협들이 쌀값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가를 돕기 위해 '쌀 지키기 88릴레이 챌린지'와 '하루 두 끼는 밥심으로' 등의 소비 촉진 운동을 벌였다.

지역 농축협을 방문하는 디지털 금융 콕 뱅크 이용 고객에게 홍보용 쌀 1㎏씩, 총 60t을 증정하기도 했다.

충남도는 현재 쌀값 폭락 원인이 쌀 과잉 공급 탓으로 보고 쌀 재배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논에 벼 대신 콩이나 밀 작물 재배를 유도하고 이를 위해 40㎏당 5천~1만원, 논을 밭으로 변경할 경우 ha당 25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모작 농가를 대상으로 내년부터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경우 장려금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쌀 생산량이 많은 지방자치단체는 쌀 재고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지역 쌀 수출에도 안간힘을 쏟고 있다.

충남 공주시는 이달 초 지역 대표 쌀인 고맛나루 쌀 8.5t을 이라크에 수출했으며, 연말까지 2∼3차례에 걸쳐 고맛나루 쌀 20여t을 이라크에 수출할 계획이다.

충남 당진시도 지난 1월 해나루쌀 10t을 싱가포르에 수출했다.

전북 정읍지역 대표 브랜드 쌀인 '단풍미인 쌀' 20t도 지난 19일 미국 수출길에 올랐고, 올해 안에 뉴욕에도 10t을 추가 수출할 계획이다.

정읍시 관계자는 "쌀 소비량 감소와 가격 하락으로 많은 농가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새로운 판로 개척을 한 데 의미가 있다"며 "단풍미인 쌀의 이미지 향상과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쌀값 바닥'에 수확 코앞에 두고 바짝 타들어 가는 '농심'
◇ 물가 인상에 주저하는 정부…"쌀공급량 조절대책 세워야"
정치권은 정부에 즉각적인 추가 수매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 추가 수매에 대해 공식반응이 없다.

치솟는 물가 인상 위기 속에 쌀값까지 높이는 것에 대해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란 시각이 많다.

추석 이후 추가 수매를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고물가 우려가 큰 상황에서 쉽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정부의 이 같은 미적지근한 대응에 대해서는 지난해부터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양곡관리법에 따라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자동시장격리를 시행해 초기부터 쌀값을 잡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현행 양곡관리법의 자동시장격리는 의무조항이 아니어서 정부가 항상 한발 뒤늦은 대처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삼석(전남 영암·무안·신안) 의원도 "한발 늦은 격리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정부가 의무적으로 자동시장 격리하도록 강제조항으로 바꿔야 한다"며 양곡관리법 법률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이다.

현행 쌀직불금 제도와 공공비축미 제도 외에 정부가 직접 쌀을 비싸게 사들이고 싸게 방출하는 과거 추곡수매제도도 다시 시행을 검토해볼 만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전남도 양곡유통 담당자는 "자유무역 체제에서 정부 직접 개입에 한계가 있는 데다 구곡 관리와 재정 관리 부담이 너무 커 현재로서 과거와 같은 추곡수매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기능성 벼, 밀 대체 벼, 쌀 가공·저장기술 개발 등을 통해 쌀값 소비 대책의 다양화 필요성도 제기된다.

쌀농가를 상대로 한 공급량 조절이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이제는 쌀소비를 고려한 적정 공급량을 산출하고 재고미를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서삼석 의원은 "식량안보와 직결된 쌀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답이 없다"며 "농민들이 쌀 생산량을 직접 조절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쌀이 시장에 나오기 전 양곡관리를 통해 정부가 공급량을 적극적으로 조절해 쌀값의 급격한 등락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준우 김형우 나보배 노승혁 손대성 양지웅 윤태현 이은파 한지은 여운창 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