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출신 러드 전 총리, 보수 성향 머독 미디어 뉴스코프 특검 추진
특검 조사 청원에 50만명 서명…정권 교체로 특검 실현 환경 변화 주목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케빈 러드 전 호주 총리가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과 그가 이끄는 뉴스코퍼레이션에 대한 특검 조사를 추진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슈 In] "머독은 암적 존재"…호주 전 총리는 왜 미디어 재벌 저격하나
호주 출신이지만 미국과 영국 등 영어권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미디어 제국을 일군 머독의 뉴스코프는 호주 미디어 시장의 약 70%를 점유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보수 성향이 강해 미국과 호주 등 주요국의 좌파 정부와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잦다.

좌파 성향인 호주 노동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인 러드 전 총리도 재임시 뉴스코프 계열 언론사들과 껄끄러운 관계였던 것이 특검 조사 추진의 배경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 "머독은 오만한 암적 존재"…러드와 머독의 악연은 15년 전부터
17일 일간 시드니모닝헤럴드 등 호주 언론에 따르면 러드 전 총리가 2년 전부터 공개적으로 추진 중인 뉴스코프 특검 조사 청원에는 지금까지 5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

맬컴 턴불 전 호주 총리 등 유명인들도 청원 서명에 동참했다.

지난해에는 특검 조사의 전초전 격인 호주 상원 조사위원회가 열리기도 했다.

러드 전 총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머독을 "우리 민주주의에 있어 오만한 암적 존재"라고 지칭하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해부터 '머독 특검을 추진하는 호주인들'(AFMRC)이란 단체도 이끌고 있다.

러드와 머독의 악연은 15년 전 러드가 제26대 호주 총리로 취임한 뒤부터 본격화했다.

[이슈 In] "머독은 암적 존재"…호주 전 총리는 왜 미디어 재벌 저격하나
'해리 포터'라는 별명을 가진 러드는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호주 노동당의 상징과도 같은 정치인이다.

2007년 11월 치러진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며 보수 성향인 존 하워드 자유당 정부의 11년 장기 집권에 마침표를 찍고 정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취임 직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교토의정서에 서명했고, 이듬해 2월에는 연방의회에서 역사적인 '원주민 탄압 사과'를 해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또 전임 하워드 정부와 달리 친중(親中), 친아시아 행보로 백호주의 이미지가 강한 호주의 외교적 지평을 넓히는 데에도 기여했다.

호주국립대(ANU)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뒤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러드는 재임시 중국어를 가장 잘하는 서방 정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호주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바꾸려 한 그의 이런 행보는 야당인 자유당은 물론 보수 성향이 강한 머독의 뉴스코프 계열 언론사와도 적잖은 마찰을 빚었다.

호주의 대표적 일간지인 디오스트레일리안을 비롯해 데일리텔레그래프, 헤럴드선, 쿠리어메일, 스카이뉴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수많은 신문·방송사들이 뉴스코프 계열이다.

호주 미디어 시장의 약 70%를 뉴스코프 계열이 점유하고 있어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진보 성향인 러드는 총리 재임시 적극적인 기후변화 대응과 원주민에 대한 포용 정책, 친중·친아시아 행보 등에 대해 비판적인 머독 계열 미디어들의 집요한 공격과 견제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러드는 "호주 정치인들은 야수같은 머독의 미디어를 두려워한다"며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총리직에서 퇴임한 후에야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 8년 9개월 만의 호주 정권교체로 '머독 특검' 실현될까
그동안 호주에서는 러드 전 총리의 노력에도 뉴스코프에 대한 특검 조사가 실현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러드가 총선에서 패배해 정권을 내줬던 2013년 9월부터 줄곧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 연립당이 의회 다수당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앤서니 앨버니지 당수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해 8년 9개월 만에 진보 성향 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앨버니지는 러드가 총리일 때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발탁했던 인물이다.

당연히 러드와 가까울 수밖에 없다.

앨버니지는 취임 직후 '원주민 탄압 사과'로 호주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러드의 노선을 이어받아 호주 원주민의 존재를 인정하는 헌법 개정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이슈 In] "머독은 암적 존재"…호주 전 총리는 왜 미디어 재벌 저격하나
또 영국 여왕이 명목상 국가원수로 돼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인 호주를 공화제로 바꾸는 안도 추진하고 있다.

선조가 영국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미국, 영국, 뉴질랜드 등 앵글로색슨 동맹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자유당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자유당의 노선을 지지해온 뉴스코프 계열 미디어 역시 노동당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호의적이지 않다.

일각에서는 자유·국민 연립당 정부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았던 머독 특검이 호주의 정권교체를 계기로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출범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앨버니지 정부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러드가 추진하는 머독 특검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미디어 정책을 담당하는 미셸 롤란드 통신부 장관은 시드니모닝헤럴드에 "미디어 독과점 이슈에 대한 특검이나 사법적 조사는 우리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앨버니지 정부의 이런 입장에도 러드 전 총리는 노동당의 차기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한 설득과 로비를 계속한다는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커스티 고린지 AFMRC 사무총장은 "우리의 다음 단계 전략은 개별 의원들을 상대로 한 로비"라며 "특히 (캐스팅보트를 쥔) 무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한 로비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