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 한 소설의 삽화 한 장이 출품됐다. 주인공은 미국의 화가 헨리 다저가 그린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the Unreal)'.

환상의 세계로 떠난 아이들이 어른들의 아동착취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의 삽화는 경매에서 75만5000달러(약 8억원)에 낙찰됐다. 다저가 정식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아웃사이더' 예술가 중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화가로 불리게 된 계기다.

이 삽화를 비롯한 다저의 작품 수백 여점을 두고 미국에서 법적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생전 다저가 살던 집 주인인 키요코 러너에 대해 다저의 먼 친척들이 그의 작품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잇따라 소송을 제기해서다.

9일 아트뉴스 등 외신에 따르면 다저의 친척들은 지난달 27일 시카고 지방법원에서 러너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이들은 "러너가 다저의 작품에 대한 상속권이 없는데도 수십년간 불법적으로 수억달러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일리노이 지방법원에 같은 이유로 소를 제기한 지 약 6개월 만이다.

시카고는 다저의 작품이 처음 발견됐던 곳이다. 다저는 생전 40여년간 시카고에서 방 한 개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았다. 병원의 잡역부로 일하며 틈틈히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72년 양로원으로 이사하며 방에 6권의 일기장, 5000쪽의 자서전, 1만5000쪽의 소설, 수채화·콜라주·연필 드로잉 등 수백 장의 그림을 남겼다.

당시 다저는 러너와 그의 남편 나단 러너에게 "방에 남긴 것 중 나에게 필요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갖다버려도 된다"고 말했다. 고아로 자랐던 다저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73년 직계가족도, 유언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사실상 다저가 자신에게 작품을 넘겨줬다는 게 러너의 주장이다.

미술계에 인맥이 있었던 러너 부부는 이후 다저의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홍보하고 판매했다. 다저의 초현실적 작품은 인기를 끌었고, 뉴욕현대미술관(MoMA), 시카고미술관, 스미스소니언 등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다저의 작품이 유명해지자 지난 1월 그의 친척 50여명이 뒤늦게 작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러너가 다저의 작품을 통해 얻은 이익을 모두 회수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미술계에선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러너가 다저의 작품을 소유하는 게 정당하지 않다는 의견과 러너의 노력이 없었다면 다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란 반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세상을 떠난 뒤 빛을 본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누가 가져야 하는지 분쟁이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생전 보모로 일하다 사후 세계적 사진작가가 된 비비안 마이어도 마찬가지다. 2018년에는 마이어가 유명해지기 전 그의 사진 필름을 경매에서 헐값에 산 영화감독 존 말루프와 마이어의 친척들 간 상속권 분쟁이 일어났다. 법적 공방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