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얼빈' 출간…"안중근-이토 운명적 만남 비극에 희망 담고 싶었다" "안중근 소설,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가족 이야기 쓸 때 가장 힘들었다"
"안중근을 말할 때 민족주의적 열정과 영웅성을 뺄 순 없죠. 하지만 그의 청춘과 영혼, 생명력을 묘사해보려고 한 게 제 소망이었어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운명적으로 하얼빈에서 만나 파국을 이루는 그런 비극성과 그 안에 든 희망까지도요.
"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을 쓴 소설가 김훈(74)이 짧고 강렬한 삶을 살았던 안중근 의사에 관한 소설을 쓰고자 오랫동안 고민한 이유는 명료했다.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는 김훈은 100%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짐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김훈은 3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젊었을 때 안중근 소설을 쓰기로 한 다음 방치했다.
밥벌이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안중근을 감당해내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는 지난해 건강이 나빠졌고 올해 봄이 돼서야 회복했다.
몸을 추스르며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고, 더는 미뤄둘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소설을 써 내려갔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필생의 과업'은 아니고 '방치한 작품'이라고 했다.
원래 그가 처음에 정한 책 제목은 '총의 노래'도 '하얼빈'도 아닌 '하얼빈에서 만나자'다.
하지만 소설의 주제를 과도하게 노출하는 것 같다는 생각, 한국인들에게 맺힌 이미지 등을 고려해 도시에 주목하고자 '하얼빈'으로 바꿨다.
소설은 크게 3가지 갈등 구조를 축으로 전개된다.
안중근과 이토의 갈등, 문명개화와 약육강식이란 시대적 갈등, 안중근이란 천주교 신자와 제국주의에 반쯤 발을 걸친 신부 간 갈등이다.
다른 대목보다 특히 김훈이 공들여 쓴 부분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작성한 안중근 신문조서를 우연히 읽고 말도 못 할 충격을 받았다"며 '칼의 노래' 집필 동기가 된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이 신문조서를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았다.
'칼의 노래'가 2001년 5월에 나왔으니 21년 만에 과제가 마무리된 셈이다.
김훈은 안중근과 동지 우덕순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거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언급하며 "가장 신바람 나고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대의명분'에 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젊은이다운 에너지가 폭발한다.
시대 전체에 대한 고뇌는 무겁지만, 처신은 바람처럼 가벼웠다"며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거구나 싶었다.
가장 놀랍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소설은 안중근의 심리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만, 안중근과 대척점에 있는 이토의 심리도 곳곳에서 보여준다.
이토는 을사늑약 이후 조선 내 소요 사태를 걱정하고, 조선의 초라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사진 촬영을 지시하며 흡족해한다.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엔 "조선이 평화와 독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길은 제국의 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훈은 "일본에서 이토의 성장기와 소년기, 전성기의 족적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봤는데 (분량을) 극도로 줄이느라 소설에 반영하지 못했다"면서도 "이토란 인간의 분위기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안중근을 쉽게 쓰지 못한 이유도 이토의 내면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안중근의 총에 맞아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인물이란 게 이토에 대한 지배적 시각이었다"며 "한 인간 안에서 문명개화란 큰 과업과 약육강식이란 야만성이 동시에 형성되고 존재한다는 것과 이토가 그것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실현하려고 한 것인가를 묘사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김훈은 이토와 달리 안중근 취재를 좀 더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올해 초 하바롭스크와 하얼빈, 대련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타고 안중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준비하다가 무산됐다.
그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 있게 글을 써낼 수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장악력이 전혀 없어서 아쉽다"고 했다.
그는 소설을 쓰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는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를 쓸 때라고 했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저격하는데,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다음 날인 27일 하얼빈에 도착한다.
안중근은 면회 온 동생 정근에게 "내가 내 처에게 못 할 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김훈은 "그런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을 뭉개고 갈 수밖에 없었다"며 "이걸 다 표현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는 조선 여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생애를 산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쓴 것을 두고 "안중근이 자기 시대에 이토를 적으로 생각해서 쏴 죽였다고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동양 평화의 명분은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중근 시대 중국은 다 무너져가고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돼 있었어요.
지금 중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미국과 쌍벽을 이루죠. 중국은 북한과 군사동맹을 만들고 있고, 일본은 대응하기 위해 군사 대국을 지향하고 있고요.
동양 평화론은 그때보다 더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안중근 시대의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