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연기가 답답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이브' 대본이 들어왔는데 선물 같았죠."
일일연속극에서 순하고 착한 맏딸이나 며느리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 유선(46)이 최근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이브'에서 막돼먹은 재벌가 사모님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유선은 히스테릭한 악역 연기로 호평을 받은 소감을 묻자 "연기 확장을 경험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2001년 MBC '베스트극장'으로 배우 데뷔를 한 유선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얼굴이지만, 뚜렷한 개성을 가진 연기자는 아니었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로 극을 완성했지만, 스스로 연기자로서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유선은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눈에 많이 보이는데,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저 스스로 연기자로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지, 내 역량이 여기까지인지 확인하는 갈림길에 섰던 순간에 표현할 방법이 너무 다양한 캐릭터인 한소라를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연기했다"며 "집에서 혼자 사전 리허설도 수없이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작품을 보고 오랜만에 연락 온 동료 배우와 통화하며 펑펑 울기도 했다.
열심히 하면 그만큼 시청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랫사람은 물론 주변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기 뜻대로 일이 안 풀리면 불같이 성질을 내는 안하무인 캐릭터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스카이 캐슬', '펜트하우스' 등에 등장했던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상류층 악역 스타일이기에 자칫 비슷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유선 역시 이를 걱정했는데, 한소라에게서 다른 상류층 악역 캐릭터에는 없는 '천진함'이라는 특징을 발견했다고 했다.
유선은 "그동안 상류층 악역을 임팩트 있게(강렬하게) 연기한 배우들이 많아서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겁이 나기도 했다"며 "한소라는 지능적이고 교활한 악녀라기보다는 최고만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발버둥 치면서 살아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 같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소라는 누가 봐도 수상한 목적이 있어 보이는 이라엘(서예지 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남편과 오랜만의 잠자리를 푼수처럼 떠들어댄다.
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가 차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데도 혼나기 싫어서 냅다 줄행랑을 치는 다소 어이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는 "한소라가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점이 괴물 같은 인간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며 "경쟁자를 짓밟고 아랫사람을 하대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삐뚤어진 인간관계를 형성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에는 한소라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해온 서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집 지하실에 갇혀야 했고, 골프채며 둔기며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 한소라에게 남편 강윤겸(박병은)은 도피처이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유선은 강윤겸을 향한 한소라의 마음이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감정 연기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한소라가 강윤겸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한소라가 자라면서 접한 남성상은 폭력적이고 다혈질인 아버지인데, 강윤겸은 따뜻하고 감정의 동요가 없다 보니 '저 남자 옆이라면 행복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 친 거죠. 절실했을 것 같아요.
"
유선은 가장 감정을 많이 쏟았던 장면으로도 마지막 회 강윤겸의 변호사가 전화로 이혼 통보 사실을 알린 순간을 꼽았다.
그는 "한소라에게 이혼은 절벽에 떨어질 듯 간당간당했던 사람을 밀어버린 것"이라며 "그 초라함을 견디지 못해 광기에 휩싸여버리는 한소라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고, 불쌍하기도 했다"고 안쓰러워했다.
이어 "그런 남편을 뺏어간 이라엘에 대한 분노는 정말 대사 그대로 죽이고 싶었을 것 같다"며 "결국 남편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이 인물이 더 악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은 시청자들도 한소라가 왜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왜 강윤겸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는지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소라는 욕망을 배출하는 잘못된 방법을 보여줘요.
성장 배경이 그런 것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가졌으면 했어요.
저한테는 한소라의 순간순간이 모두 절절하고 마음 아팠어요.
그래서 (종영을 했으니) 보내줘야 하는데 발걸음이 잘 안 떨어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