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39)숭고한 삶의 노동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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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일노래는 우리의 것…전통의 재발견·전승"
"중요한 건 대중에 알리기 위한 상설 무대와 기회"
"어허! 어려려려려∼" 최근 제주의 한 대학 병원 로비에서 진료차 내원한 할아버지 한 분이 의자에 앉아 트로트도 가곡도 아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가 할아버지께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고 여쭤봤다.
"몰라요.
"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아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기자의 모습에 미안하셨던지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젊었을 때 일하며 불렀는데 제목을 몰라. 그냥 부르는 거지…."
진료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무료함을 달래고자 습관적으로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다름 아닌 제주의 '일노래'(노동요)였다.
깊게 팬 주름과 검버섯, 듬성듬성 난 수염, 거친 손마디에서 지난한 세월, 고된 노동의 흔적이 묻어났다.
10일 제주의 풍습과 전통, 제주어를 고스란히 간직한 일노래의 의미와 가치, 전승 방안을 들여다본다.
◇ 고된 노동…제주 사람들의 숙명
"제주는 물로 뱅뱅 돌아진 섬(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사람들은) 밭이든 바다에서든 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노래가 많았어요.
일노래는 일하면서 불렀던 소리라 반주도 없이 한(恨)으로 우려내며 불렀어요.
"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제주농요 2대 보유자인 김향옥(70) 씨는 제주 일노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모진 바람과 돌투성이의 척박한 화산 지형의 자연환경을 가진 제주에서 사람들은 고된 삶을 살았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제주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밭에서든 바다에서든 일해야 했고, 고된 노동을 이겨내려 '노래의 힘'이라도 빌어야 했다.
제주의 대표적 일노래 중 하나인 '밭 밟는 소리'를 보면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제주만의 독특한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이 담겼다.
'밭 밟는 소리'는 조 농사를 지을 때 불렀던 일노래다.
제주의 땅은 푸석푸석한 화산회토로 덮여 있고 돌이 많아 좁씨를 뿌려도 바람에 날아가 버리거나 비에 쓸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제주에서 조 농사를 지으려면 산에서 풀을 뜯던 말 떼를 밭에다 몰아넣고 좁씨가 흙 속에 파묻혀 발아가 이뤄지도록 반드시 밭을 밟아줘야 했다.
이때 말과 소통하듯 사람들은 '밭 밟는 소리'를 불렀다.
빨리 밭을 밟아 일을 마무리하면 산중에 다시 데려다 올려주겠다고 노래하며 말을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자신의 신세 한탄을 말들에게 풀어놓기도 한다.
집에 병든 남편과 우는 아기를 내버려 두고 말을 몰면서 일해야 했던 제주 여인의 한을, 뙤약볕 아래 힘들게 일을 하는 고통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늙어가는 인생사를 노래에 담아 훌훌 털어버리듯 불렀다.
바다에서 해녀들 사이에 집단으로 불리는 일노래도 있다.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관광객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후렴구가 있는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노래'(해녀 노 젓는 소리 또는 물질소리 등으로도 불림)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까지 테왁을 짚고 헤엄치거나, 인근 섬까지 노를 저어 가며 뱃물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다.
특히, 거센 바닷물결을 거슬러 가는 동안 노를 잡고 힘차게 밀고 당기는 모습에서 강인한 제주 해녀의 기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 한 켠이 쓰라린다.
'ㅎ+ㆍ+ㄴ착손에 빗창줴곡 ㅎ+ㆍ+ㄴ착손에 테왁을 줴영 ㅎ+ㆍ+ㄴ질두질 들어간보난 저승길이 분명하다'(한쪽 손에 빗창 쥐고, 한쪽 손에 테왁을 쥐어 한길 두길 들어가 보니 저승길이 분명하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 삼시굶엉 물질ㅎ+ㆍ영 ㅎ+ㆍ+ㄴ푼두푼 버은금전 낭군님의 술값도 부족이여'(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삼시세끼 굶으며 물질해 한푼 두푼 벌어들인 금전 낭군님 술값도 부족이여)
'설룬세ㅅ+ㆍ+ㄹ 어린ㅈ+ㆍ식 버려두고 금전따라 오랏더니 아니받을 요고생을 다 받아 일천고생 다 받아가네'(서러운 세살 어린 자식 버려두고, 금전 따라왔더니 아니 받을 요 고생을 다 받아 일천 고생 다 받아 간다)
해녀는 이 고생을 이겨내며 삶을 살아왔다.
◇ 전통을 잇는 사람들
제주 일노래가 오늘날 노동 현장에서 불리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옛날 방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의 흥을 돋울 때 흥겨운 트로트 또는 빠른 비트의 댄스 음악이 더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주 일노래를 알고 전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지역의 민요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제주 일노래만의 특징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일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긴 제주어 유산과 선조들의 삶의 단편, 정서, 애환 등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 당시를 살지 않은 현세대들도 일노래를 들으며 선조들의 삶을 유추하고 가슴 먹먹한 아픔, 감동을 느낀다.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을 이끄는 고영림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 집행위원장은 "제주 일노래는 우리 것이다.
전통을 제대로 재발견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지속 가능하게 이어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언어를 잃어버리면 정신이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진다.
일노래 속에 담긴 제주방언이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은 지난 2020년 여름 첫선을 보인 뒤 2021년, 2022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출연자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멍석을 깔아 무대를 만들고 마이크와 스피커, 악기도 없이 홀로 무대 위에 오른다.
그 옛날 밭에서 또는 바다에서 일하며 부르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부르는 소리꾼의 노래와 몸짓은 그 어떤 기계장비를 통하지 않고 그저 바람을 타고 흘러 청중에게 전달된다.
육성 그대로를 고집하는 공연의 특성상 청중은 더욱 일노래 가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소리꾼과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추임새를 넣으며 교감한다.
제주농요보존회와 이어도민속예술단, 덕수리민속보존회 등 실력 있는 단체들과 젊은 소리꾼들이 함께하며 제주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일노래 상설공연 외에도 차귀도해녀소리보존회 등이 공연을 통해 재현·보급에 힘쓰고 있다.
개별 소리꾼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바람은 한결같다.
대중에게 일노래를 언제든 알릴 수 있도록 무대에 설 기회를 달라는 것 하나다.
홍송월 이어도민속예술단장은 "전통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공연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일노래를 들려주고 보여줌으로써 대단히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홍 단장은 "(우리들은)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함께 설 수 있는 무대와 기회"라고 강조했다.
강명언 서귀포문화원장은 상설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세심한 행정적 지원을 기대했다.
그는 "문화예술 지원 정책이 공모사업 위주로 이뤄지다 보니 신세대 예술공연 중심으로 이뤄진다.
상대적으로 기획력이 부족한 50∼60대 계층의 일노래 단체가 선택받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강 원장은 "젊은 세대, 이주민 등에게도 정당한 기회가 돌아가야 하지만 일노래 전통이 이어갈 수 있도록 공모 사업 과정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중요한 건 대중에 알리기 위한 상설 무대와 기회"
"어허! 어려려려려∼" 최근 제주의 한 대학 병원 로비에서 진료차 내원한 할아버지 한 분이 의자에 앉아 트로트도 가곡도 아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가 할아버지께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고 여쭤봤다.
"몰라요.
"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아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기자의 모습에 미안하셨던지 할아버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젊었을 때 일하며 불렀는데 제목을 몰라. 그냥 부르는 거지…."
진료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무료함을 달래고자 습관적으로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다름 아닌 제주의 '일노래'(노동요)였다.
깊게 팬 주름과 검버섯, 듬성듬성 난 수염, 거친 손마디에서 지난한 세월, 고된 노동의 흔적이 묻어났다.
10일 제주의 풍습과 전통, 제주어를 고스란히 간직한 일노래의 의미와 가치, 전승 방안을 들여다본다.
◇ 고된 노동…제주 사람들의 숙명
"제주는 물로 뱅뱅 돌아진 섬(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사람들은) 밭이든 바다에서든 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노래가 많았어요.
일노래는 일하면서 불렀던 소리라 반주도 없이 한(恨)으로 우려내며 불렀어요.
"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제주농요 2대 보유자인 김향옥(70) 씨는 제주 일노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모진 바람과 돌투성이의 척박한 화산 지형의 자연환경을 가진 제주에서 사람들은 고된 삶을 살았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제주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밭에서든 바다에서든 일해야 했고, 고된 노동을 이겨내려 '노래의 힘'이라도 빌어야 했다.
제주의 대표적 일노래 중 하나인 '밭 밟는 소리'를 보면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제주만의 독특한 환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이 담겼다.
'밭 밟는 소리'는 조 농사를 지을 때 불렀던 일노래다.
제주의 땅은 푸석푸석한 화산회토로 덮여 있고 돌이 많아 좁씨를 뿌려도 바람에 날아가 버리거나 비에 쓸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제주에서 조 농사를 지으려면 산에서 풀을 뜯던 말 떼를 밭에다 몰아넣고 좁씨가 흙 속에 파묻혀 발아가 이뤄지도록 반드시 밭을 밟아줘야 했다.
이때 말과 소통하듯 사람들은 '밭 밟는 소리'를 불렀다.
빨리 밭을 밟아 일을 마무리하면 산중에 다시 데려다 올려주겠다고 노래하며 말을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자신의 신세 한탄을 말들에게 풀어놓기도 한다.
집에 병든 남편과 우는 아기를 내버려 두고 말을 몰면서 일해야 했던 제주 여인의 한을, 뙤약볕 아래 힘들게 일을 하는 고통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늙어가는 인생사를 노래에 담아 훌훌 털어버리듯 불렀다.
바다에서 해녀들 사이에 집단으로 불리는 일노래도 있다.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관광객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후렴구가 있는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해녀노래'(해녀 노 젓는 소리 또는 물질소리 등으로도 불림)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까지 테왁을 짚고 헤엄치거나, 인근 섬까지 노를 저어 가며 뱃물질을 할 때 부르는 노래다.
특히, 거센 바닷물결을 거슬러 가는 동안 노를 잡고 힘차게 밀고 당기는 모습에서 강인한 제주 해녀의 기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 한 켠이 쓰라린다.
'ㅎ+ㆍ+ㄴ착손에 빗창줴곡 ㅎ+ㆍ+ㄴ착손에 테왁을 줴영 ㅎ+ㆍ+ㄴ질두질 들어간보난 저승길이 분명하다'(한쪽 손에 빗창 쥐고, 한쪽 손에 테왁을 쥐어 한길 두길 들어가 보니 저승길이 분명하다)
'물로 뱅뱅 돌아진 섬에 삼시굶엉 물질ㅎ+ㆍ영 ㅎ+ㆍ+ㄴ푼두푼 버은금전 낭군님의 술값도 부족이여'(바다로 둘러싸인 섬에 삼시세끼 굶으며 물질해 한푼 두푼 벌어들인 금전 낭군님 술값도 부족이여)
'설룬세ㅅ+ㆍ+ㄹ 어린ㅈ+ㆍ식 버려두고 금전따라 오랏더니 아니받을 요고생을 다 받아 일천고생 다 받아가네'(서러운 세살 어린 자식 버려두고, 금전 따라왔더니 아니 받을 요 고생을 다 받아 일천 고생 다 받아 간다)
해녀는 이 고생을 이겨내며 삶을 살아왔다.
◇ 전통을 잇는 사람들
제주 일노래가 오늘날 노동 현장에서 불리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옛날 방식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의 흥을 돋울 때 흥겨운 트로트 또는 빠른 비트의 댄스 음악이 더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주 일노래를 알고 전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지역의 민요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제주 일노래만의 특징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일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긴 제주어 유산과 선조들의 삶의 단편, 정서, 애환 등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 당시를 살지 않은 현세대들도 일노래를 들으며 선조들의 삶을 유추하고 가슴 먹먹한 아픔, 감동을 느낀다.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을 이끄는 고영림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 집행위원장은 "제주 일노래는 우리 것이다.
전통을 제대로 재발견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지속 가능하게 이어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언어를 잃어버리면 정신이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진다.
일노래 속에 담긴 제주방언이 사라지지 않도록 함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 일노래 상설공연은 지난 2020년 여름 첫선을 보인 뒤 2021년, 2022년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출연자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멍석을 깔아 무대를 만들고 마이크와 스피커, 악기도 없이 홀로 무대 위에 오른다.
그 옛날 밭에서 또는 바다에서 일하며 부르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부르는 소리꾼의 노래와 몸짓은 그 어떤 기계장비를 통하지 않고 그저 바람을 타고 흘러 청중에게 전달된다.
육성 그대로를 고집하는 공연의 특성상 청중은 더욱 일노래 가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소리꾼과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추임새를 넣으며 교감한다.
제주농요보존회와 이어도민속예술단, 덕수리민속보존회 등 실력 있는 단체들과 젊은 소리꾼들이 함께하며 제주의 전통을 잇고 있다.
일노래 상설공연 외에도 차귀도해녀소리보존회 등이 공연을 통해 재현·보급에 힘쓰고 있다.
개별 소리꾼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바람은 한결같다.
대중에게 일노래를 언제든 알릴 수 있도록 무대에 설 기회를 달라는 것 하나다.
홍송월 이어도민속예술단장은 "전통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
공연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일노래를 들려주고 보여줌으로써 대단히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홍 단장은 "(우리들은) 금전적인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함께 설 수 있는 무대와 기회"라고 강조했다.
강명언 서귀포문화원장은 상설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세심한 행정적 지원을 기대했다.
그는 "문화예술 지원 정책이 공모사업 위주로 이뤄지다 보니 신세대 예술공연 중심으로 이뤄진다.
상대적으로 기획력이 부족한 50∼60대 계층의 일노래 단체가 선택받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설명했다.
강 원장은 "젊은 세대, 이주민 등에게도 정당한 기회가 돌아가야 하지만 일노래 전통이 이어갈 수 있도록 공모 사업 과정에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