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말러의 교향곡을 '헤어질 결심'에 넣은 까닭은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형사 해준(박해일 분)은 진실을 찾아 바위산에 오른다. 피의자 서래(탕웨이 분)의 죽은 남편이 사망 당일 갔던 산이다. 해준은 서래를 향한 의심과 관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런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산을 타기 시작한다. 이곳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 아니, 해준은 어떤 진실이 있기를 바랄까.

지난 5월 열린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사진)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때 해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음악이 흐른다. 오스트리아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다. 아름답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지는 곡이다.

말러리안 박찬욱이 그린 로맨스

지난달 29일 개봉한 이 영화는 변사 사건을 수사하는 해준이 사망자 부인인 서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작품은 박 감독의 전작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잔인하거나 폭력적인 장면 없이도 두 사람의 눈빛과 심리 묘사만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박 감독 특유의 미장센(화면 속 세트나 소품 등 시각적 요소의 배열)과 영화적 미학은 감탄사를 부른다. 그리고 말러의 음악은 이를 완성하는 주요 장치가 된다. 박 감독은 말러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를 일컫는 말러리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품에 넣은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앞서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도 나왔다. 작곡가 아센바흐(더크 보거드 분)는 죽음을 앞두고 만난 소년 타지오(비요른 안드레센 분)에게 매료된다. 피하려 할수록 상대에게 빠져드는 점, 사랑과 함께 죽음이 어우러지는 점이 ‘헤어질 결심’과 비슷하다. 박 감독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 쓴 곡을 사용한 것에 대해 “흉내 내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 오랜 시간 대체할 만한 다른 음악을 찾았지만,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말러가 아다지에토를 만든 건 41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심각한 장출혈로 건강이 악화됐다가 점차 회복됐고, 지휘자로 이름도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19세 연하의 여인 알마 쉰들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다지에토는 그 마음을 담아 만든 작품이다. 아다지에토는 ‘매우 느리게’를 뜻하는 아다지오보다 조금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말러는 아무 설명도 없이 이 곡의 악보를 쉰들러에게 보냈다. 뛰어난 작곡가인 쉰들러는 의미를 알아채고 “나에게 오라”는 답장을 건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졌고 결혼에 이르렀다.

‘청록색’ 같은 사랑과 아다지에토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이 곡을 듣다 보면 다층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다 점점 어둠과 고독을 느끼게 된다. 말러는 이 악장의 마지막에 ‘뤼케르트 시에 의한 5편의 가곡’ 중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란 자신의 작품을 인용했다. 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곡에 잊혀짐에 대한 얘기를 넣은 걸까.

신기하게 말러와 쉰들러의 이야기도 음악을 닮았다. 말러는 아내가 작곡가 활동을 접고 가정에 충실하길 바랐다. 쉰들러도 처음엔 받아들였지만 점차 답답함을 느꼈다. 다섯 살 딸이 성홍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 사이는 한층 더 멀어졌다.

알마 쉰들러
알마 쉰들러
쉰들러는 여러 유명 예술가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의 모델이 쉰들러라는 얘기도 있다. 오스카 코코슈가의 그림 ‘바람의 신부’도 쉰들러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쉰들러는 바우하우스(독일의 대표 예술학교) 창립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람도 피웠다. 말러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쉰들러는 그로피우스와 재혼을, 시인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말러의 사랑 얘기를 알고 나면 아다지에토에 담긴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9개인 말러의 교향곡은 각각 하나의 거대한 우주라고 할 수 있다. 말러는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과 사랑, 죽음, 자연까지 여러 주제를 교향곡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개별 악장에도 일종의 소우주를 담아냈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에 담긴 복합적인 감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 것이다.

박찬욱이 말러의 교향곡을 '헤어질 결심'에 넣은 까닭은 [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헤어질 결심’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엔 청록색이 자주 나온다. 서래의 원피스, 서래의 집 벽지가 전부 청록색이다. 청록색은 누군가에겐 청색, 누군가에겐 녹색으로 보인다. 박 감독은 “한 사람에게 다가가면 또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색을 통해 그런 점을 시각화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 설레지만 두렵고, 충만하다가도 한순간 공허한 게 사랑이다. 매우 느리지만 조금 빠르게, 아름답지만 고독한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박 감독의 영화에 꼭 필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