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그린 사랑의 이중성, 그리고 아다지에토[김희경의 영화로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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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해준(박해일 분)은 진실을 찾아 바위산을 오릅니다. 피의자 서래(탕웨이 분)의 죽은 남편이 사망 당일 올랐던 산이죠.
그는 서래를 향한 의심과 관심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해준은 복잡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곳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요. 아니, 해준은 어떤 진실이 있길 바랄까요.
지난 5월 열린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한 장면입니다. 이때 해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음악이 흐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지난해 개봉한 이 영화는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이 사망자의 아내인 서래를 만나게 되며 시작됩니다. 해준은 서래를 의심하며 지켜보다, 갈수록 강하게 이끌리게 됩니다.
작품은 박 감독의 전작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잔인하지 않고 수위도 낮지만, 두 인물의 눈빛과 심리 묘사만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킵니다. 서래의 서툰 한국말에 담긴 익숙하면서도 낯선 언어의 질감 역시 인상적입니다. 죽은 남편에 대해 서래는 이렇게 말하죠.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걱정'과 '마침내'라는 단어의 기묘하고 탁월한 조합이 놀랍습니다.
박 감독이 탄생시킨 미장센(화면 속 세트나 소품 등 시각적 요소의 배열)의 향연과 뛰어난 영화적 미학에도 연신 감탄하게 되는데요. 말러의 음악은 이를 완성하는 주요 장치가 됩니다. 박 감독은 말러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을 일컫는 '말러리안'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 사용된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앞서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도 나왔습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인 작곡가 아센바흐(더크 보거드)는 죽음을 앞두고 만나게 된 소년 타지오(비요른 안드레센)에 매료됩니다. 피하려 할수록 상대에게 더욱 빠져들게 된다는 점, 사랑과 함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어우러진다는 점이 '헤어질 결심'과 비슷합니다.
박 감독은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동일한 곡을 사용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비슷한 걸 사용하며 흉내 내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 오랜 시간 대체할 만한 다른 음악을 찾았지만, 결국 대안을 찾지 못했다.” 말러의 음악이야말로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곡이라는 얘기죠.
그렇다면 말러는 어떤 마음으로 아다지에토를 만들었을까요. 그가 이 곡을 만든 건 41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이때는 그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시기였습니다. 심각한 장출혈로 건강이 악화됐다가 점차 회복됐고, 지휘자로 이름도 알렸습니다. 그리고 19살 연하의 여인 알마 쉰들러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다지에토는 쉰들러에 대한 마음을 담아 만든 작품입니다. 아다지에토는 '매우 느리게'를 뜻하는 '아다지오'보다 조금 빠르게 연주하라는 의미의 음악 용어입니다.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이 곡이 아다지에토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말러의 제자였던 빌렘 멘겔베르그에 따르면 이 곡은 말러가 쉰들러에게 보내는 일종의 연애 편지였습니다. 말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작품의 악보를 쉰들러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뛰어난 작곡가였던 쉰들러는 음악이 가진 의미를 바로 알아채고 자신에게 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졌고 결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듣다 보면, 다층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엔 말러의 연인에 대한 애틋함과 절실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점점 선율에서 어둠과 고독이 배어 나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말러는 이 악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베이스 연주에 자신의 가곡을 인용했는데요. 그 가곡은 '뤼케르트 시에 의한 5편의 가곡' 중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란 작품입니다. 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곡을 쓰면서 이런 내용을 함께 넣은 건지 선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신기하게도 이들의 이야기도 음악을 닮았습니다. 말러는 쉰들러에게 작곡가 활동을 접고 가정에 충실하길 바랐습니다. 쉰들러도 처음엔 받아들였지만 점차 답답함을 느꼈죠. 그러다 큰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두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요. 5살이던 장녀가 성홍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쉰들러는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습니다.
쉰들러는 당시 빈에서 활동하던 유명 예술가 다수의 뮤즈로 꼽힐 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의 모델이 쉰들러라는 추측도 있죠. 말러와 클림트, 즉 두 명의 '구스타프'가 동일한 여성을 사랑했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오스카 코코슈가의 그림 '바람의 신부'도 쉰들러를 사랑한 코코슈가의 마음을 담은 작품입니다. 쉰들러는 딸의 죽음 이후 바람을 피웠습니다. 바우하우스(독일의 대표 예술학교)의 창시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만났죠. 말러는 부인의 외도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져,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말러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쉰들러는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습니다. 이후 시인 프란츠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했죠. 말러의 사랑 이야기를 알고 나면 그의 아다지에토에 담긴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총 9개에 이르는 말러의 교향곡은 각각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자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과 사랑, 죽음, 자연까지 여러 주제를 교향곡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단 하나의 악장에도 일종의 소우주를 담아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담긴 복합적인 감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인 거죠.
'헤어질 결심'도 이와 비슷합니다. 영화엔 특히 '청록색'이 자주 나오고 부각됩니다. 서래의 원피스, 서래의 집 벽지가 다 청록색이죠. 청록색은 누군가에겐 청색,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엔 녹색에 가깝게 보입니다. 박 감독은 청록색에 담긴 이중성에 대해 이같이 설명합니다. "한 사람에게 다가가면 또 다른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색을 통해 그런 점을 시각화하고 싶었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설레지만 두렵고, 충만해진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매우 느리지만 조금 빠르게, 아름답지만 고독한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박 감독의 영화에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