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양국 간 해운협정으로 경쟁 제한된 시장…담합 효과 미미"
심사관은 과징금 부과 의견 냈지만, 전원회의서 뒤집혀…중국 반발 의식 지적도
한-일항로 담합 과징금 수백억원인데 한-중항로는 0원인 이유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한-일 항로 해상 운임을 담합한 컨테이너 정기선사들에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지만 한-중 항로 해운 담합에 대해서는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기로 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9일 공정위는 2003년 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76차례 운임을 합의한 국내외 15개 선사에 시정명령과 함께 800억8천800만원(잠정)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반면 2002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68차례 운임을 합의한 27개 국내외 선사에 대해서는 과징금 없이 앞으로는 불법적인 담합 행위를 하지 말라는 시정명령만 내렸다.

공정위는 올해 1월에도 한-동남아 항로에서 2003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120차례 운임을 합의한 23개 선사에 시정명령과 962억6천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한-동남아 항로, 한-일 항로, 한-중 항로에서 이뤄진 담합의 형태·기간·내용이 모두 비슷했지만 제재 수준은 크게 엇갈렸다.

공정위 사건 담당 부서가 작성한 심사보고서(검찰의 공소장 격)에는 한-중 항로 운임을 담합한 선사에도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나 전원회의에 참여한 위원들의 판단은 달랐다.

공정위 사건은 심사관이 조사공무원을 통해 사실관계를 조사한 뒤 법 위반 여부를 심사해 조치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제출하면, 9명의 위원이 전원회의 또는 소회의 심의를 거쳐 법 위반 여부와 제재 수준을 최종 판단하는 구조로 처리된다.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국장은 "공동행위의 유형이나 형태, 내용 등은 한-동남아, 한-일, 한-중 모두 큰 차이는 없다"면서도 "한-중 항로는 양 정부가 공급량을 제한해 어느 정도 경쟁이 제한된 상태에서 운임 담합을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생하는 경쟁제한 효과나 피해,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위원회가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중 항로는 양국 정부가 1993년 해운협정(조약)을 맺은 이후 매년 해운회담을 열고 선박 투입량 등을 오랜 기간 관리해온 폐쇄적 시장이어서 담합에 따른 피해가 적다는 점이 고려됐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공정위가 중국 선사들의 주장처럼 이 사건 담합행위를 해운협정에 근거한 정당한 공동행위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조 국장은 "경쟁제한 효과나 파급효과가 한-일 항로, 한-동남아 항로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관점에서 과징금까지 부과할 정도인지를 위원들이 고민한 것 같다"며 "그런 측면에서 과징금은 부과하지 않고 시정명령만 내렸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한-중 항로 선사 간 운임 합의에 과징금을 부과하면 중국 정부의 외교적 반발이 예상되는 점도 공정위 결정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중국은 이번 제재를 앞두고 공정위에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내 양국 정부 간 합의를 존중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해양수산부도 지난 1월 "한-중 항로에서 이뤄진 선사 간 운임 합의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하면 양국 간 해운협정이 유명무실하게 된다"며 "중국 정부의 외교적 반발과 한·중 해운협정 파기 등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냈다.

조 국장은 이와 관련한 질문에 "외교 마찰에 대한 부분까지 깊게 고민을 했는지는 저도 전원회의장에 없었기 때문에 모른다"면서도 "경쟁법 조문과 이론, 이 사건 행위와 한-중 항로의 특성, 해운업의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교적 반발을 의식해 제재 수위를 억지로 낮춘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 국장은 "한-중항로는 경쟁제한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고, 양국 정부가 관리하는 항로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자유 경쟁하는 다른 항로와는 달리 취급할 필요가 있다는 측면"이라고 덧붙였다.

선사들이 한-동남아 항로 담합에 대한 공정위 제재에 이의신청 또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에 미뤄볼 때 한-일 항로 담합에 대해서도 불복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내 선사들은 한-동남아 항로 담합 제재 결정에 대해 공정위에 이의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일부 외국 선사는 곧바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