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체결 과정에서, 계약서에 기재한 계약금 전부가 지급되지 못하고 그 중 일부만이 수수되면서, 나머지 계약금은 조만간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체결을 예상치못하고 물건을 둘러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을 방문했다가 급작스럽게 계약체결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계약서상에는 총 대금의 10% 정도를 계약금으로 기재하게 되지만 당장 준비해간 돈이 많지 않아 기재된 계약금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만을 수수하게 되는 것이다. 분양계약이나 임대차계약과정에서 이런 현상이 적지 않다.

그후 계약이행이 문제없이 진행되면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약정된 계약금에 미치지 못하는 일부 계약금만이 수수된 상태에서 계약을 해약하게 되거나 계약위반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분쟁이 복잡해질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계약금을 기준으로 계약을 해제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되는데, 이와 같은 기준이 되는 계약금을 실제로 수수된 금액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수수되지는 못했더라도 약속된 계약금 전부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계약금의 요물(要物)성과 관련해서 학설상 논란이 많다. 계약금계약은 실제로 교부된 금액의 범위에서만 계약으로서의 효력이 있다는 요물계약성을 어느 정도 범위에서 관철하느냐에 따라 학설이 다투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사례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직 법원의 판단도 분명치않다.

최근 필자가 담당한 사건재판에서 이 점에 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서울고등법원 2006. 11. 21. 선고 2006나 34260호 판결이다.

■ 사안의 개요

법원에서 인정한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필자의 의뢰인이 주장한 사실관계와는 차이가 있지만, 일응 법원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를 기준으로 정리한다).

필자의 의뢰인은 2005년경 성남 분당의 아파트 1채를 대금 5억5천만원에 팔기로 계약했다. 계약서에는 계약금 5천5백만원, 중도금 2억원, 잔금 3억원으로 기재했다. 그런데, 계약당일 매수인인 상대방이 준비한 돈이 350만원에 불과해서 일단 350만원 실제로 수수하고, 나머지 계약금 5,150만원은 며칠 후에 매도인 구좌로 송금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나머지 계약금 입금예정일에 의뢰인은 계약을 이행할 뜻이 없다는 점을 상대방에게 밝히면서 입금구좌를 해약하는 방법으로 계약금수령을 거절했다. 또 계약을 해약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공탁절차까지 바로 밟았다. 그런데, 공탁한 금액은 계약서상에 계약금으로 기재된 5,500만원이 아니라 실제로 받은 350만원의 2배인 700만원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상대방인 매수인은 매도인인 의뢰인이 대금수령을 거절하는 등 계약을 위반하였으므로 손해배상책임이 있는데, 계약서상에는 계약금 상당의 손해배상예정규정이 있고, 이 사건 계약금은 실제로 수수된 금액이 아니라 계약서에 약정된 금액인 5,500만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급한 350만원과 5,500만원을 합한 5,850만원을 손해배상으로 지급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소송진행과정에 계속 아파트값이 수억원 이상 상승하자, 약정된 계약금 5,500만원만 받아서도 억울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매수인은, 소송도중에 변호사를 선임하고서 손해배상을 구하는 그동안의 청구취지를 바꾸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즉, 기존의 손해배상청구를 2차적(예비적)청구로 미루고, 1차적(주위적)으로 이전등기를 구하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매도인이 민법 565조에 의한 해약을 위해서는 계약금의 2배를 이행제공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계약금이 5,500만원이라는 점에서 실제 수수된 350만원을 기준으로 공탁을 통해 돌려준 것은 해약절차로 부적법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매계약은 그대로 유효하기 때문에 이전등기청구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피력했다.

■ 법원이 제시한 계약금판단의 기준

이 사건에 가장 중요한 쟁점은, 해약하거나 손해배상예정액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계약금이 얼마인지이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실제 수수된 계약금이 아니라 약정된 액수 전부를 계약금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이 사건에서 법원의 판단기준은 계약금계약이 요물계약이냐 아니냐하는 학설논의에서와 달랐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즉, 법원은 “ ---피고(매도인)가 이 사건 매매계약을 유지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약정계약금의 수령을 거부하는 등 약정계약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피고에게 있음이 명백한 이상, 원피고 사이에 매매계약 해제권유보약정의 기준으로 정한 계약금은 피고가 실제 지급받은 350만원이 아니라 약정계약금인 5,500만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판시했는데, 이는 결국 계약체결 경위, 계약불이행 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구체적인 사건에서 해약이나 손해배상의 기준이 되는 계약금이 얼마인지를 판단해야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사실, 재판진행과정에서 필자가 자문을 구했던 여러 법조실무의 중론도 마찬가지였다. 학설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선례도 없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필자에게 자문해 준 주변 법조인들 모두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견해를 피력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설득력있는 접근방법이 바로 이 사건 재판부가 판단한 방법이었다. 학계에서 논의하는 요물계약성이라는 형식적인 기준 보다는 약정한 계약금 보다 적은 금액이 수수되게 된 경위, 계약이 이행되지 않은 경위 등을 고려해서, 개별 사안들마다 당사자가 위약이나 해약의 기준으로 삼은 계약금액이 어떤 것이었느냐를 구체적으로 따져야한다는 결론인 것이다. 결국 계약금이 얼마인지 하는 문제 역시 구체적인 계약의 해석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법원판단의 주류는 이런 기준에 입각할 것으로 짐작한다.


이 사건을 수임하면서 필자 생각에는, 비록 대법원판례는 없더라도 하급심판례는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급심판례를 전혀 검색할 수 없었다. 여러 주변 판사들에게 문의한 결과, 이런 유형의 사건이 적지않게 발생하기는 하지만 판결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 거의 대부분 조정을 통해 합의시키기 때문에 판결로 선고된 경우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사건 1심 재판부 역시, 여러차례에 걸친 조정을 시도한 끝에 제소된 지 무려 1년6개월이 지나서 어쩔 수 없이 판결을 선고했고, 이 사건 2심 재판부 역시 선고일자를 한 차례 연기하는 등 이례적인 과정을 거쳐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 사건판단은 선례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전등기청구가 기각된 원인

한편, 계약금이 얼마인지에 관한 쟁점과 별개로, 이 사건의 판결결론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계약금이 5,500만원이라면 매도인으로서는 해약을 위해 계약금 5,500만원에 받은 금액 350만원을 합한 금액을 공탁(반환)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도인은 해약하기 위한 계약금을 실제로 받은 금액인 350만원으로 판단한 나머지 그 금액의 2배인 700만원만을 공탁해버렸다. 따라서, 해약절차는 부적법했고, 다른 사정이 없다면 매매계약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유효하기 때문에 이전등기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매수인에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매수인의 이전등기 청구를 기각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매도인이 계약이행을 하지 않을 조짐을 보이자, 매수인은 계약이 해제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와 같은 소장이 계약위반의 책임이 있는 상대방인 매도인에게 도달함으로써 결국 계약을 해제하는 의사표시가 도달되면서 계약해제의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약해제의 의사표시는 철회할 수도 없어( 민법 543조 2항), 한 번 이런 의사표시를 했다면 특별한 다른 사정이 없는 한 더 이상 매매계약은 유효해 질 수 없다. 따라서, 계약이 유효함을 전제로 하는 이전등기청구 역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가격이 오름세에 있어 이전등기를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판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자문을 구하지 않고서 이전등기청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은채 매수인 본인이 무작정 손해배상청구를 함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더구나, 최근에 분당아파트 값이 다시 폭등함으로써 이전등기를 받지 못함으로 인한 매수인의 경제적인 손실은 더 커지게 되었다). 형식적인 재판결과는 매수인이 1차적( 주위적)으로 청구한 이전등기청구는 기각되고, 2차적(예비적)으로 청구한 5,500만원을 기준으로 한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었지만, 이 사건 아파트값이 두배나 상승한 지금상황에서는 사실상 의뢰인이 이긴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사건은 필자에게도 두가지 점에서 기억에 많이 남는 사건이었다. 첫 번째는, 선례도 없고 법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사건이어서 하급심판례까지 하나하나 검색하는 등 다른 사건에 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두 번째는 상대방의 잘못된 판단으로 계약해제를 전제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섣불리 제기한 결과, 어부지리로 헐값에 아파트를 넘겨줄뻔한 위기를 매도인이 넘기게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법적인 분쟁에서 정확한 법적 자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재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였다. -이상-




<참고법령 및 판결>

■ 민법 제565조 (해약금)
①매매의 당사자일방이 계약당시에 금전 기타 물건을 계약금, 보증금등의 명목으로 상대방에게 교부한 때에는 당사자간에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의 일방이 이행에 착수할 때까지 교부자는 이를 포기하고 수령자는 그 배액을 상환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 민법 제543조 (해지, 해제권)
①계약 또는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당사자의 일방이나 쌍방이 해지 또는 해제의 권리가 있는 때에는 그 해지 또는 해제는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한다.
②전항의 의사표시는 철회하지 못한다.

■ 대법원 1999. 10. 26. 선고 99다 48160호 판결
매매계약에 있어서 매수인이 계약금을 지급하되 매도인이 계약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그 배액을 배상받고, 매수인이 계약을 위반하였을 때에는 계약금을 포기하여 반환을 청구하지 않기로 약정하였으나, 매수인이 당시 계약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일단 계약금을 지급하였다가 되돌려 받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처리하기로 하여 계약금 상당액의 현금보관증을 작성하여 매도인에게 교부한 경우,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에는 계약금 상당액의 위약금 약정이 있었다고 볼 것이므로, 매수인이 계약을 위반하였다면 실제로 계약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정한 위약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 대법원 1991.5.28. 선고 91다9251 판결
매매계약을 맺을 때 매수인의 사정으로 실제로는 그 다음날 계약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도 형식상 매도인이 계약금을 받아서 이를 다시 매수인에게 보관한 것으로 하여 매수인이 매도인에게 현금보관증을 작성 교부하였다면, 위 계약금은 계약해제권유보를 위한 해약금의 성질을 갖는다 할 것이고 당사자사이에는 적어도 그 다음날까지는 계약금이 현실로 지급된 것과 마찬가지의 구속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이어서 당사자는 약정된 계약금의 배액상환 또는 포기 등에 의하지 아니하는 한 계약을 해제할 수 없기로 약정한 것으로 보는것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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