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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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씨의 상속인으로는 하나, 둘희, 세재의 3자녀가 있습니다. 부인과 사별한 뒤 몇 년 전 맘이 맞는 동거희 씨를 만나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상속분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서 혼인신고를 극력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구수한 씨는 몇 개월 전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몇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처음에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네요. 하지만 남편의 재활을 돕기 위한 사실혼 아내 동거희 씨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까지 회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녀들은 얄밉게도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것인 양 상속재산 분배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의사표현이 가능하게 된 구수한 씨는 유언을 하겠다며 동거희 씨와 자녀 셋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변호사와 법무사도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구수한 씨는 먼저 아버지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만 욕심내는 자녀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은 사실혼 아내인 동거희 씨에게 나누어줄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다만 자녀들이 향후 소송을 제기할 것을 우려해서, 자녀들에게도 유류분에 해당하는 비율(각자 1/6)만큼은 나누어주기로 했네요.

구수한 씨가 불러준 내용을 변호사가 받아적었고, 가족들 앞에서 낭독한 후 변호사와 법무사가 증인으로서 날인했습니다. 며칠 뒤 법원에 가서 검인신청도 받았어요. 이 과정에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눈 밖에 날까봐 입도 뻥긋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 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구수한 씨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유언장을 작성했던 변호사가 유언에 따른 재산분배를 진행하려 하자, 자녀들이 선임한 다른 변호사가 제지하고 나섭니다. 유언장은 아무런 효력이 없으므로 동거희 씨는 전혀 상속권이 없고 전 재산은 자녀들이 1/3씩 분배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림 - 이영욱]
[그림 - 이영욱]

민법상의 유언장 작성방식

민법상 유언장의 작성방식의 종류와 그 특징은 아래와 같습니다. 각각의 유언의 방식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유언은 무효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구수한 씨가 불러준 내용을 증인이 받아적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유언을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이라 합니다.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은 질병이나 급박한 사유 때문에 다른 방식에 의한 유언이 불가능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받아 적은 유언장, 아무 효력 없다니…'청천벽력' [정인국의 상속대전]
민법

제1070조(구수증서에 의한 유언)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은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하여 전 4조의 방식에 의할 수 없는 경우에 유언자가 2인 이상의 증인의 참여로 그 1인에게 유언의 취지를 구수하고 그 구수를 받은 자가 이를 필기낭독하여 유언자의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후 각자 서명 또는 기명날인하여야 한다.
② 전항의 방식에 의한 유언은 그 증인 또는 이해관계인이 급박한 사유의 종료한 날로부터 7일내에 법원에 그 검인을 신청하여야 한다.
③ 제1063조제2항의 규정은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에 적용하지 아니한다.

이 사건의 경우는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해야 하는 급박한 사정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구수한 씨가 재활치료를 통해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까지 건강을 회복해서 다른 방식에 의한 유언이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지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우선 「녹음에 의한 유언」이 가능했어요. 변호사와 법무사가 증인으로 참여하였으니, 스마트폰이나 녹음기를 켜고 유언자의 유언내용과 증인의 참여사실을 녹음하면 됩니다.

2. 다음으로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도 생각할 수 있네요. 유언에 참여한 변호사가 공증인의 자격이 있다면, 다른 2명을 증인으로 참여케 한 다음 공증인이 유언내용을 받아적으면 됩니다. 주의할 점은 공증인과는 별도로 증인이 2명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유언이 가능한데도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한 결과, 상황은 동거희 씨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동거희 씨는 사실혼 관계일 뿐 법률상 배우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속권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동거희 씨가 구수한 씨를 병간호했으니 기여분을 인정받아야 할 것 같지만, 민법상 기여분은 상속인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결국 자녀들 셋이서 법정 상속비율로 1/3씩 재산을 분배받고 상속은 종결됩니다. 자녀들이 별도로 배려하지 않는 한, 동거희 씨는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합니다.

이 사건은 유언에 참여한 변호사의 책임도 큽니다. 구수한 씨가 유언을 할 때 녹음기만 켰어도 될 일입니다. 변호사의 실수 때문에 유언장 자체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겁니다.
[대법원 1999. 9. 3., 선고, 98다17800, 판결]

민법 제1065조 내지 제1070조가 유언의 방식을 엄격하게 규정한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하고 그로 인한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정된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그것이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하더라도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바, 민법 제1070조 제1항이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은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로 인하여 민법 제1066조 내지 제1069조 소정의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및 비밀증서의 방식에 의하여 할 수 없는 경우에 허용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상, 유언자가 질병 기타 급박한 사유에 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유언자의 진의를 존중하기 위하여 유언자의 주관적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및 비밀증서의 방식에 의한 유언이 객관적으로 가능한 경우까지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허용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정인국 한서법률사무소 변호사/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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