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갑' 23년 되면 기관지 세포 돌연변이 증가 멈춰
DNA 복구·흡연 해독 잘하는 시스템 작동하는 듯
미국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대, 저널 '네이처 유전학' 논문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흡연은 각종 암을 유발하는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폐암 발생에 관한 흡연의 위험도는 다른 요인들을 압도한다.

그런데 전체 흡연자 가운데 폐암에 걸리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평생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은 비흡연자가 폐암에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미국 과학자들이 흡연과 폐암 발생의 유전적 연관성을 최초로 입증했다.

담배를 많이 피워도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사람은 흡연 기간이 20여 년 지나면 더는 돌연변이를 축적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흡연의 독성을 완화하고 손상된 DNA를 잘 복구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흡연이 유전자 돌연변이를 더 많이 일으켜 폐암 위험을 높인다는 것도 분명히 확인됐다.

지금까지 흡연이 폐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는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 통계적 연관성을 근거로 했다.

다시 말해 비흡연자보다는 흡연자 중에서 폐암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다는 의미였다.

이번 연구는 담배를 심하게 피우면 돌연변이 유전자가 더 많이 생겨 실제로 폐암 위험이 커진다는 걸 처음 입증했다.

미국 뉴욕 소재 '알버트 아인슈타인 의대'(Albert Einstein College of Medicine) 과학자들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11일(현지 시각) 저널 '네이처 유전학'(Nature Genetics) 온라인판에 논문으로 실렸다.

논문의 공동 수석저자인 사이먼 스피바크 유전학 교수는 "말기 암을 발견하면 큰 비용을 쓰고도 치료 예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면서 "이번 연구 결과는 폐암의 위험 요인을 조기 진단해 차단하는 단계로 향하는 중요한 진전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흡연이 폐 세포의 DNA 돌연변이를 촉발해 폐암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추정에 불과할 뿐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었다.

이 의대의 유전학과 과장으로서 논문의 공동 수석저자를 맡은 얀 페이흐(yan vijg) 박사는 "그런 연관성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었다"라면서 "정상 세포의 돌연변이를 정확히 수량화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페이흐 박사는 이 의대의 분자 유전학 석좌교수다.

또 중국 상하이 자오퉁대 의대의 '단세포 체학 연구 센터'(Center for Single-Cell Omics)에서 연구한 경력도 있다.

현재 쓰이는 '단세포 전체 유전체 시퀀싱'(Single-cell whole-genome sequencing) 기술로 염기서열을 분석하면 진짜 돌연변이와 구분하기 어려운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어떤 세포에 드물고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생겼을 땐 이런 오류가 염기서열 분석에 치명적 결함을 초래할 수 있다.

페이흐 박사는 SCMDA(단세포 다중 전위 증폭)라는 독자적 기술을 개발해 기존 분석법의 오류를 해결했다.

관련 논문은 2017년 저널 '네이처 유전학'에 게재됐다.

연구팀은 비흡연자 14명(11∼86세), 비흡연자 19명(44∼81세)의 기관지 상피세포를 분리해 SCMDA 분석법으로 돌연변이 형태를 비교했다.

이들 흡연자가 담배를 피운 기간은 도합 116년(하루 1갑 기준)에 달했다.

논문의 흡연 기간은 '팩 이어'(pack year) 단위로 표시했다.

1 '팩 이어'는 하루 한 갑씩 1년간 담배를 피웠다는 의미다.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받은 환자에게서 분리한 상피세포는 원래 수십 년까지 살아남는다.

그래서 노화와 흡연 등으로 생긴 돌연변이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폐에 있는 모든 유형의 세포 가운데 기관지 상피세포는 암세포로 변할 가능성이 가장 컸다.

실험 결과, 비흡연자도 나이가 들면 기관지 상피세포에 돌연변이가 축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흡연자의 상피세포에서 훨씬 더 많은 돌연변이가 발견됐다.

여기서 돌연변이는 단일 뉴클레오타이드의 변이, 삽입, 탈락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스피바크 박사는 "그동안 흡연자의 폐암 위험이 비흡연자보다 크다는 건 하나의 가설이었다"라면서 "그런데 담배를 피우면 돌연변이 발생 빈도가 높아져 폐암 위험도 커진다는 게 실험을 통해 확인됐다"라고 강조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폐 세포의 돌연변이 수는 흡연 기간('팩 이어')이 길어지는 것에 맞춰 거의 일직선으로 증가했고, 폐암 발생 위험도 커지는 거로 나타났다.

그런데 상피세포의 돌연변이 증가세는 흡연 23년째를 정점으로 멈췄다.

가장 담배를 자주 피운 흡연자에게 가장 많은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또 연구 데이터만 보면 심한 흡연자가 많은 흡연량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았다.

스피바크 박사는 "이런 흡연자들은 돌연변이가 계속 축적되는 걸 억제하는 듯하다"라면서 "매우 효율적으로 DNA 손상을 복구하거나 흡연을 해독하는 시스템을 갖췄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연구팀은 개인의 DNA 복구 또는 흡연 해독 능력을 측정하는 검사법을 개발하는 것에 후속 연구의 초점을 맞췄다.

페이흐 박사는 "개인별로 폐암 위험을 미리 알아보는 새로운 진단법이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는 미국 NIH(국립 보건원)의 자금 지원으로 이뤄졌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