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림산방에 먼저 찾아온 봄
진도는 ‘휴(休)의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주,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고, 진도대교로 육지에 연결(1984년)된 지 벌써 38년인데도 외딴섬처럼 조용하다. 카페의 숫자가 관광 활성화의 척도라고 한다면, 진도는 확실히 ‘관광 오지’다. 석양이 아름다운 북서쪽 해안도로조차 카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진도의 경승지를 소개한 푯말에 2019년 개장한 대명 쏠비치진도가 포함돼 있을 정도다. 그나마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倭)를 격파한 격전의 현장인 명량과 가수 송가인 덕분에 인지도가 올라가긴 했어도 진도의 진짜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진도(珍島)는 이름처럼 숨겨진 보석과 같은 곳이다.
운림산방을 방문한 날, 때마침 제2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우연은 반갑기 그지없다.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무대 뒤 조용한 배우들의 대기실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아마도 이날 오전엔 진도 군수를 비롯해 지방 유지를 자처하는 이들이 기념관 앞에서 의미 없는 덕담을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한 뒤 총총히 제 갈 길을 갔을 터다. 제2기념관은 소치에서 시작해 5대까지 이어진 허씨 일가의 화맥을 한데 모은 곳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기존 기념관은 소치의 시·서·화만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재단장하고,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현존 작가인 4대 임전 허문과 5대 오당 허진 등의 한국화 수작을 신축 기념관에 모아놨다. 정통 조선 남종화에서부터 5대 허씨 화원의 현대 작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다. 특히 제2기념관엔 미디어 아트를 구현한 공간이 크게 마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소치 5대 일가가 그린 모란, 매화, 대나무 등을 디지털 이미지로 화려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화면에 손을 대면 꽃잎이 봄비처럼 공중으로 우수수 흩날린다.
소치 허련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초의 선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추사가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지만, 진도 변방의 몰락한 명문가 출신인 소치는 끊임없이 중앙 화단에 입성하려고 애썼다. 몇 안 되는 소치 연구자들에 따르면 “허련이 당시 주요 유배지의 하나인 진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인격·의식 형성은 물론 인생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와 같은 대학자의 높은 평가는 한없는 자부심이 되었고…중앙 화단에의 집착은 그의 주유 경로가 오직 서울과 그의 고향인 진도, 한때 그가 살았던 전주와 서울을 왕래하는 것만으로도 극명히 드러난다”. 기록에 의하면 진도의 명주로 꼽히는 홍주는 허련 집안의 가주였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싸고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허씨 가문이 진도로 이주하면서 지역주로 정착했다는 설(說)이 전해진다.
잔잔한 호수처럼 소박한 진도의 바다
진도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꼽힌다. 그중에서도 섬 북서쪽 해안 일주도로가 압권이다.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아예 세방낙조라는 고유 명사를 부여받은 세방에서 시작해 쉬미항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저녁 무렵 달리면 한국의 미(美)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흔히 백제 건축물에 수식어처럼 쓰이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의 경지가 진도의 자연에도 딱 들어맞는다. 해안가 경승지라면 으레 있을 법한 카페나 화려한 리조트, 펜션조차 없어 인공미 없는 자연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해안 일주뿐만 아니라 진도 내륙 곳곳을 누비는 맛도 색다르다. 훈풍이 부는 이맘때 창을 열고 홀로 드라이브를 해보자. 창 너머로 상록수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를 연상시킨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동해와 달리 잔잔한 호수처럼 소박한 진도의 바다와 닮았다. 이번 여행길에 미처 가보지는 못했지만, 운림산방 바로 위 첨찰산 쌍계사 상록수림은 잎 넓은 나무들이 울창한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 되는 숲길이다.
별미, 쏠비치진도 인근의 뻘낙지와 전복
삼별초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던 것도 이번 진도 기행의 큰 수확이다. 배중손 등 삼별초의 장군들은 군민 1만여 명을 배에 태워 진도에 산성을 쌓고 궁을 지었다. 그 터가 용장성이다. 계단식으로 견고하게 석축을 만들고 행궁을 지었다. 고려 무인정권의 강화도 임시 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여몽 연합군에 끝까지 결사 항전하던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로 건너가 마지막 전쟁을 벌였지만, 진도에 있던 대부분의 군민은 전쟁터의 화살받이로 죽임을 당하거나 몽골로 끌려갔다고 한다.이 시절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는 장소가 하나 있다. 삼별초궁녀둠벙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인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온(溫)이 몽골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궁녀와 부하들이 고갯길을 넘어 도망치다 끝내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장소다.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설화와 비슷하다. 차를 도로에 세워두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여기가 맞나 싶을 만큼 작은 저수지 하나가 나온다. 예전엔 훨씬 넓었을 둠벙의 수심은 바다와 연결돼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깊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가 오랫동안 구전된 탓에 이곳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비가 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여인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니, 담력을 시험할 젊은 청춘들 아니면 찾아갈 엄두를 내기 힘든 곳이다. 게다가 둠벙 위로 을씨년스럽게 폐가까지 남아 있어 생각하기에 따라선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들고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둠벙 인근 사방으로 동백이 지천이고, 붉은빛이 더 선명한 듯하다.
진도=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