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경주서 학술대회…명칭·건물 배치·변화상 주제로 논의
조사할수록 수수께끼…신라 사찰 '황복사지' 정체·성격은
경북 경주 낭산 북쪽에는 국보로 지정된 신라 유물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황복사 터에 세운 삼층석탑이라는 뜻이다.

황복사는 신라 고승인 의상대사가 654년 출가했다는 절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닮았지만, 규모가 다소 작은 황복사지 석탑에서는 1942년 이뤄진 조사를 통해 불상과 구슬을 비롯해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그중 사리함에서는 탑의 건립 배경 등을 알려주는 글자도 확인됐다.

내용을 요약하면 692년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 그의 부인 신목태후와 아들 효소왕이 탑을 세웠으며, 706년에는 성덕왕이 불상과 불경을 봉안했다는 것이다.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글자도 있어 이 사찰은 종묘 기능을 한 왕실 사원으로 추정됐다.

문화재청은 석탑 주변 사찰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2016년부터 경상북도·경주시와 함께 5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많은 유구(遺構·건물의 자취)와 유물이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출토 유물 32점을 지난해 전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듭된 발굴조사에도 황복사지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주제다.

건립 시기와 건물 배치, 유물 성격은 물론 심지어 절터 명칭을 두고도 여러 의견이 제기됐다.

조사할수록 수수께끼…신라 사찰 '황복사지' 정체·성격은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경주시와 함께 17일 경주 힐튼호텔에서 '황복사지 발굴조사 성과와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고 14일 밝혔다.

이날 공개된 발표문에서도 연구자들은 황복사지가 여전히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사찰이라는 데 동의했다.

기조 강연자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사찰은 발굴을 통해 거의 전모가 드러난 상태"라면서도 "발굴에 앞서 지녔던 숱한 의문이 일정 수준에서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나고 깊어져 마치 심연 속에 빠진 듯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찰 위치와 낭산에 있는 다른 사찰과 관계를 근거로 황복사지를 실제 황복사 터로 보기 어렵다면서 "신문왕대에 창건된 사찰 정도로 부르는 것이 무난하며, 굳이 구체적 대상을 지목한다면 봉성사"라고 주장했다.

황복사지 발굴조사를 수행한 성림문화재연구원 김희철 조사기획부장은 "황복사지 창건 연대는 640년부터 의상대사가 출가한 654년 이전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초기에는 건물이 남북 방향을 따라 금당, 동서 목탑, 중문으로 세워졌으나, 692∼705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세워지면서 종묘로서의 기능을 지닌 왕실 사찰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금당은 조성된 뒤 기단의 증축과 보수가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김유신장군묘와 형식이 유사하거나 시기가 다소 이른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을 가져와 사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사할수록 수수께끼…신라 사찰 '황복사지' 정체·성격은
김지현 동국대 강사는 '황복사지'라는 표현을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아예 유적 이름을 '구황동 사지(寺址·절터)'로 지칭했다.

그는 목탑 터로 추정되는 유적은 종루(鐘樓·종을 달아두는 누각)나 경루(經樓·불경을 보관하는 누각)일 가능성이 크며, 애초 이 절에는 탑이 없었으나 신문왕이 사망한 뒤 명복을 비는 사찰로 변하는 과정에서 석탑이 조성됐다고 봤다.

한욱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은 "황복사는 사천왕사보다 이른 2탑 1금당 불교 사원이었고, 삼층석탑 건립 이후 중심축이 바뀐 듯하다"며 "황복사는 오랫동안 존속되면서 여러 이유로 변화를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학술대회는 문화재청과 경주시 유튜브 계정을 통해 중계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