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0%였다. 200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로, 전년 상승폭(1.4%)의 세 배 수준이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은 더 취약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하는 등 대외 의존도가 높고 경제 구조 자체도 수출 중심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더 취약한 까닭지난달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 경제의 원유 의존도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2020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하루 원유 소비량은 국내총생산(GDP) 1만달러당 5.70배럴에 이르렀다. OECD 회원국 중에서는 2위인 캐나다(5.07배럴)를 앞질렀으며 일본(2.36배럴) 독일(1.94배럴) 등의 두세 배에 이른다. 개발도상국이면서 산유국인 브라질(5.87배럴)과 비슷한 수준으로, 중국(3.49배럴)을 큰 폭으로 넘어선다.이는 정유 및 철강, 석유화학 관련 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올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까지 오르면 전년 대비 원가 상승률은 산업별로 정유 23.50%, 철강 5.26%, 석유화학 4.82%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선박(1.47%)과 자동차(1.40%), 건설(1.17%)산업 등의 원가도 오른다.문제는 이 같은 원가 상승을 한국 기업들이 판매가격에 전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산업계 관계자들은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춘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세계시장의 경쟁이 치열해 원가 상승폭만큼 판매가를 올리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현대경제연구원도 “원유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국제 유가가 상승할 때 다른 국가와 비교한 비용 상승 압력이 한국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의미”라며 “세계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상대 가격이 오르며 기업들의 매출 및 이익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지적했다.지난해부터 나타나고 있는 곡물 가격 급등세도 한국에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은 곡물을 수입하고 있다. 자급률은 2019년 기준 25.5%에 그친다. 산업국가인 독일(104.7%)은 물론, 경지면적 비율 등이 한국과 비슷한 일본(29.7%)에도 못 미친다. 한국은 특히 밀과 콩, 옥수수 등 3대 곡물의 수입 비중이 95.0%에 이르러 OECD 중 최하위권이다.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면 국내에서 소비되는 농산물 가격도 뛰는 구조다. 사료용 곡물의 수입 비중도 67.7%에 달해 육류 가격 인상으로도 이어지기 쉽다. 수입 다변화 등 완충장치 시급주요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대기업 비율이 물가 상승기에 경제 안정성을 떨어뜨린다는 분석도 있다. 이창양 KAIST 경영대 교수는 “미국이나 독일은 전체 기업의 25%가 대기업으로 생산성이 높은 데다 주력 산업도 다변화돼 있어 인플레이션을 견디기 쉽다”며 “한국은 대기업 비율이 1%에 불과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생산성과 가격 협상력이 낮아 대외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이자보상비율(영업이익을 총이자비용으로 나눈 비율)이 100%에 못 미치는 중소기업이 절반을 넘어선 상황에서 글로벌 물가 상승에 따른 악재까지 더해지면 기업 도산 등 실물경제 타격이 우려된다.에너지 및 식량의 높은 대외 의존도와 대기업 비중이 낮은 산업구조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글로벌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외환시장 안정 및 수입처 다변화에 정부가 신경쓸 필요가 있다는 주문이 나왔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서 환율까지 상승하면 국내 기업의 비용 부담이 크게 뛴다”며 “이미 원·달러 환율이 1200원대 초반까지 오르며 1년 사이 외환 조달 비용이 10% 가까이 높아진 만큼 정부는 관련 시장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유가가 치솟고 에너지 위기가 닥치자 미국 석유 기업들이 화석연료 규제를 풀고 새로운 시추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26일(현지시간) 가디언에 따르면 미국석유협회(API)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이용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에너지 안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미국은 물론 동맹 유럽 국가를 돕기 위해서라도 미 당국은 규제를 풀고 추가 시추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PI는 미국의 대표 석유기업인 엑슨모빌, 셰브런 등이 소속된 이익단체다.일부 공화당 의원도 이에 동참하면서 API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리사 머코프스키 공화당 상원의원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추가 원유 생산을 허용하지 않으면 미국에 해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이크 서머스 API 회장도 “우리는 풍부한 원유 공급 능력을 불필요하게 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당분간 고유가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미국 석유 기업들의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미 석유 기업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친환경 정책으로 석유 시추 부담금이 인상되는 등 규제 압박을 받고 있다.하지만 최근 국제 유가가 치솟으면서 미국은 인플레이션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작년 동기 대비 7.5%로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에너지 가격은 27% 올라 상승폭이 가장 컸다.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석유 기업에 대한 규제를 이어나가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대통령이 유가를 통제하지 못해 인플레이션이 이어진다면 민주당이 하원과 상원을 장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고유가로 인해 바이든 대통령은 이달 초 석유 기업들에 추가 공급을 요청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유가가 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25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미국은 유가 상승 우려에 러시아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안을 내놓으면서도 에너지 부문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제재는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것”이라며 “에너지 분야에 제재를 가할 경우 국제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푸틴 대통령의 배를 불리는 이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맹진규 기자 maeng@hankyung.com
1970년대 오일쇼크(석유파동)가 촉발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악몽이 다시 어른거리고 있다. 주요 산유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원유값이 뛰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 우려를 낮추는 동시에 물가를 잡아야 하는 세계 각국의 셈법이 복잡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1970년대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었다.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73년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돕는 나라를 대상으로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이듬해 12월 유가는 전년 동기 대비 세 배 넘게 상승해 배럴당 11.5달러에 이르렀다. 1979년에는 이란혁명이 터지면서 원유 생산량이 급감했다. 1980년 4월 유가는 1년 전보다 두 배가량 뛰어올라 배럴당 39.5달러를 찍었다.유가 상승세는 물가 전반으로 퍼졌다. 1976년 초 5%를 밑돌았던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979년 11%까지 치솟았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유명한 폴 볼커 미 중앙은행(Fed) 의장이 등장했을 때가 이 당시다.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지명한 그는 경기 침체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급속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볼커는 취임 당시 연 11% 수준이었던 기준금리를 2년 만인 1981년 연 19%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 물가 상승률은 4%대(1982년 말)로 내려갔다. 유럽 국가들도 단계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해 1980년대 물가 안정화에 성공했다.오일쇼크와 닮은꼴인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면서 기준금리 인상을 둘러싼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이 깊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높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기존 계획대로 기준금리를 높여야 하지만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경기 침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오일쇼크 당시 미국이 초고금리 정책을 펼쳤을 때도 단기적으로는 실업률이 높아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가디언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있지만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예고된 기준금리 인상이 연기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고 전했다.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