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과 오랜 친분 문화계 인사들 애도…"놀라운 아이디어 가진 천재"
"엄청난 다독가"…"고인만큼 모든 분야 통섭할 수 있는 사람 못봐"
"이틀후 뵙기로 했는데"…이어령, 마지막까지 예술·인문학 얘기
"그저께 자택에서 임종처럼 뵈었어요.

침대에 누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근배 병풍'이라고 하셨죠. 제가 쓴 병풍을 눈앞에 두고 계셔서 많이 울었습니다.

"
26일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과 60여 년 지기인 시인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1960년대 초에 만나 친형제처럼 늘 뵈었다"며 "박학다식함은 물론이고 그분의 천재성은 놀라운 아이디어 박스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어른은 발명가 같았다"며 "'디지로그'란 새로운 용어를 쓰셨고 문명과 관련해 늘 시대보다 앞서가셨다.

독서를 엄청나게 하셨는데 이 어른만큼 모든 걸 통섭할 수 있는 분은 보지 못했다"고 떠올렸다.

이 전 원장은 또 "2~3년 전, 건축을 모르시는 분이 건축가들 모임에서 김소월 시 '엄마야 누나야'로 이야기를 하시더라"며 "모든 사물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 전통, 역사, 예술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셨다.

남이 본 것에서 늘 한 발짝 더 들어가 보셨다.

유럽에서 태어났으면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계인의 지성이 됐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이 전 원장은 소설, 시, 평론, 희곡을 아우른 고인에 대해 "시의 어휘 하나도 음절 하나가 가진 것까지 새롭게 해석하셨다"며 "재작년엔 추운 야외에서 외투도 안 걸치고서 칠판을 놓고 분필을 들더니 시인 이상을 강의하셨다.

이상문학상도 제정하셨지만 천재 이상의 '오감도' 등 난해한 시를 정말 쉽게 열정적으로 강의하신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이틀후 뵙기로 했는데"…이어령, 마지막까지 예술·인문학 얘기
고인과 60년 가까이 인연을 맺은 김종규 문화유산신탁 이사장 겸 삼성출판박물관장은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어렵게 만든 인물이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고인은 한국의 앙드레 말로(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소설가)라고 할까"라며 "우리 문화가 성큼 세계화하는 데 누구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그런 아이디어가 그냥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면 그만큼 지식을 많이 쌓았다.

엄청난 다독가였다"고 떠올렸다.

이어 "문인, 학자, 교수, 문화행정가의 종합세트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 한류가 부흥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0여 년 동안 고인과 친분을 쌓아온 화가인 김병종 가천대 석좌교수는 이틀 뒤 고인을 뵙기로 했었다며 황망한 마음을 전했다.

김 교수는 고인에 대해 "철저한 인문학자셨다"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세속적인 언급 없이 책에 대한 말씀이나 인문학적 화두를 얘기하셨다.

야심한 밤에도 잠이 안 오시면 전화로 예술, 인문학, 기독교 세 개 주제를 갖고 굉장히 길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기독교인이 되신 이후 신실하게 교회를 다니진 못하셨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있으셨다"며 "죽음이 껍질을 벗고서 자유로운 세계로 이동한다는 말씀, 모든 의식과 감각기관이 육체를 갖고 있을 때보다 더 예민해지리란 것, 그래서 천국의 실존을 확실히 믿으셨다"고 기억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