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축복의 집·소피의 세계
▲ 축복의 집 = 해수(안소요 분)는 공장에서 작업복이 땀과 먼지에 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한다.

퇴근하고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니다.

식당에서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불판을 닦고, 음식물 쓰레기 처리까지 끝내고 나서야 재개발이 진행되는 동네의 어두컴컴한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한동안 대사도 내레이션도 없이, 일터와 집을 오가는 주인공의 뒤를 따라다닌다.

카메라에 담긴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고되고 퍽퍽한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해수가 표정도 말도 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생긴 궁금증은 엄마의 자살을 숨긴 채 보험금을 타려는 계획이 드러나며 긴장감으로 바뀐다.

[새영화] 축복의 집·소피의 세계
꽃도, 찾아오는 이도 없는 텅 빈 빈소에 보험 담당자(이정은)가 불쑥 나타나 알 수 없는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확인할 때, 엄마의 자살 흔적을 없애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해수의 은밀한 계획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며 보험금을 나눠 가지려는 경찰관과 시신을 보지도 않고 돈을 받고 검안서를 내주는 의사, 경찰과 짬짜미한 보험사 직원의 묵인으로 가능했다.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염습과 입관, 발인, 화장 절차가 통곡 한번 없이 초라하고 건조하게 이어지고, 주민센터에서 사망 신고서를 바탕으로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린 뒤 고인의 주민등록증을 가위로 잘라내는 것으로 해수의 계획은 마무리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행정 시스템에서 처리되는 과정과 위태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젊은 여성의 소리 없는 몸부림이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하게 담겼지만, 여느 극적인 이야기 이상으로 쓸쓸하고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 각색에 참여했던 박희권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2월 2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새영화] 축복의 집·소피의 세계
▲ 소피의 세계 = 수영(김새벽 분)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다.

2년 전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여행자 소피(아나 루지에로)의 블로그다.

수영은 소피가 서울 북촌에 머물렀던 나흘 동안 남긴 기록과 사진을 통해 당시 남편 종구(곽민규)와 자신이 겪었던 힘든 시간을 돌아보면서,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들을 확인하고 당시의 감정을 떠올린다.

소피는 소피대로 수영과 종구를 지켜보는 한편, 북촌 일대를 거닐며 한국 친구를 찾아다니거나 만나고,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극적인 사건 없이 여러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며 나누는 대사가 중심이 되는 구성이나 감독에게 친숙한 한정된 장소에서 이뤄진 촬영, 출연 배우들의 면면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인 2020년 가을부터 이듬해 1월까지 촬영한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마스크를 자연스럽게 착용했다.

홍 감독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해 온 이제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3월 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