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신간] 그들의 말 혹은 침묵·하버드 스퀘어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지난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프랑스 현대문학 대표 작가 아니 에르노의 초기 장편 소설.
주인공 안은 고등학교 입학 전 여름 방학에 처음 사랑과 성을 경험한다.

미지의 성을 체험하고 싶던 그는 뜻한 바를 이루지만, 평등을 설파하고 자유연애를 긍정하는 남성들이 막상 여성에게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을 깨닫는다.

안은 또한 약자는 짓밟히는 세상이라며 맞서라던 어머니가 엘리트 계급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모순적 태도에 연민과 염증을 느낀다.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안은 작문 과제를 받고서 지난여름의 내밀한 경험을 떠올린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쓴다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겠지. 자유롭게 써도 된다면 피와 비명에 대해 말할 텐데'. 안은 첫사랑의 실패처럼 제도권 언어와 자기 언어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방황한다.

작가의 초기작 중 실험적인 글쓰기와 문체가 도드라진 작품이다.

사춘기 소녀의 생각을 두서없이 쏟아내듯이 무질서한 '날 것'의 언어가 속도감 있게 이어진다.

단락도 거의 바꾸지 않고, 이야기의 마지막도 뒷말이 전개될 듯 당혹스럽게 끝난다.

성장소설 같지만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여성과 노동자 계급 출신이란 자신의 조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란 소신처럼 사적 체험인 듯 사회적인 영역의 이야기다.

민음사. 204쪽. 1만4천 원.
[신간] 그들의 말 혹은 침묵·하버드 스퀘어
▲ 하버드 스퀘어 =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2007년 첫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유명한 작가의 장편 소설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영화로도 제작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청춘에 자리한 여름의 뜨거움을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젊은 날의 '지나가 버린 여름'을 성숙해진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집트에서 추방된 유대인 출신 하버드 대학원생 화자는 1977년 여름, 택시 운전사 칼리지와 우연히 만난다.

둘은 이방인이자 주변인인 서로를 알아보며 가까워진다.

칼리지는 세상 모든 것에 독설을 퍼부으며 '나'의 작은 세상을 흔들어 놓는다.

소설은 시간이 흘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화자가 하버드대학을 다시 방문해 지난날을 돌아보는 액자식 구성이다.

주인공이 작가와 동일한 배경을 가진 분신이란 점에서 상상력에 기반한 서사와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비채. 392쪽. 1만5천800원.
[신간] 그들의 말 혹은 침묵·하버드 스퀘어
▲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 강지희, 김신회, 심너울, 엄지혜, 이세라, 원도, 이훤, 정지돈, 한정현, 황유미 지음.
오늘, 사람들은 점심에 뭘 먹을까.

모두에게 점심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사무실 막내였던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중략) 삼계탕이고 회 정식이고 다 싫었다.

내가 원하는 점심 메뉴는 혼자 말없이 먹는 구내식당 밥이었다.

'(김신회 '구내식당 덕후' 중)
'많은 비정규직이 점심을 거르기 일쑤고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중략) 점심을 거르는 건 그 사람이 나약한 의지나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 관리를 놓쳐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가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상황의 문제일 때가 많다.

'(강지희 '점심이 없던 날들' 중)
문학평론가 강지희, 에세이스트 김신회, 과학소설(SF) 작가 심너울, 기상캐스터 출신 이세라, 소설가 정지돈 등 10명의 저자가 점심을 테마로 각각 다섯 편씩 쓴 산문집이다
점심 식사에 초점을 맞춘 글도 있고, 점심때 쓴 글도 있다.

점심시간을 활용해 식당이나 카페에서 읽기 좋도록 짤막한 길이로 쓰였다.

강지희 씨는 시간 강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불규칙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점심을 살펴봤다.

원도 씨는 현직 경찰관답게 언제 신고가 들어올지 몰라 촉각을 곤두세운 상황에서 선배들 식사 속도를 따라잡고자 뜨거운 국물로 목구멍을 데이는 직장 생활을 실감 나게 풀어냈다.

매일 반복되는 점심시간과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한겨레출판. 308쪽. 1만4천 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