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거치며 러시아·서방 사이서 끝없이 피의 수난
자원보고·요충지로 단골 격전장…러·나토 대치로 또 위기

러시아의 침공 우려 고조로 우크라이나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서방에 기댔지만 자칫 자국 영토를 러시아와 서방 간 대결의 전쟁터로 내줘야 할 처지가 됐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달리고 있다.

[우크라 긴장고조] 세계열강 틈새 위태로운 우크라…또다시 전장되나
서방에 맞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서방 강대국 간 분쟁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다.

우크라이나가 단일 국가로 존재한 역사는 고작 30여 년에 불과하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련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서 단일 민족국가의 기틀을 잡고,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완전한 독립국이 됐다.

그 이전까진 크게 보면 동남부 지역과 중서부의 2개 지역이 각각 러시아와 유럽국가들의 지배를 받으며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돼 있었다.

그 와중에 기름진 땅과 풍부한 자원, 지정학적 위치 등으로 끊임없는 침략과 분쟁에 휘말려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포함하는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면적이 큰 나라다.

세계 흑토지대의 30%를 차지하는 옥토에서 곡물을 생산해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린다.

세계적 매장량을 자랑하는 철광석·석탄·망간·니켈·흑연 등을 포함해 멘델레예프의 원소 주기율표에 나오는 대부분의 자원을 가진 자원 부국이기도 하다.

여기에 서유럽과 러시아·아시아를 잇는 통로에 자리한 탓에 주변 강대국들의 끝없는 침략과 대결의 장이 됐다.

17~18세기엔 폴란드와 러시아의 대결 와중에 이쪽과 저쪽으로 휩쓸리며 피해를 봤고, 러시아가 스웨덴과 격돌한 대북방전쟁(1720~1721) 시기에는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가 패해 코사크 전사들과 농민들이 전장과 노역에 끌려 나가는 수난을 당했다.

[우크라 긴장고조] 세계열강 틈새 위태로운 우크라…또다시 전장되나
18세기 중후반 '폴란드 분할' 때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의해 영토가 동서로 쪼개져 현재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정치·사회 분열의 뿌리가 됐다.

18세기 말부터 1차대전까지 120년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의 80%가 러시아 제국, 20%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지배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각각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할하에 있던 우크라이나 동서 두 지역이 동족에게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피를 흘리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맞붙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인구의 6분의 1인 530만 명을 잃었고, 소련 전체 물적 피해 가운데 40%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하는 재앙을 겪었다.

독립을 쟁취하려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러시아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주변 강국에 의지해 자치와 독립을 꾀하고, 그러한 정책이 다른 강국의 적대와 보복을 불러 수난을 당하는 우크라이나의 비극적 역사는 21세기에도 재현되고 있다.

약 70년의 소련 지배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독립국을 세우고 긴 혼란 끝에 나토와 유럽연합(EU) 가입을 목표로 한 친서방 노선을 선택했지만, 또다시 저항하기 어려운 러시아의 압박에 직면했다.

러시아는 이웃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자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며 이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나토의 확장을 저지하겠다는 태세로 우크라이나 남·동·북부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한 뒤 연일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에 맞서 미국과 나토도 동유럽과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으로 군대를 증파하면서 우크라이나군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다시금 러시아와 서방의 격전장이 되고 무고한 우크라이나인들이 피를 흘리는 비극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 긴장고조] 세계열강 틈새 위태로운 우크라…또다시 전장되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