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컨, 적대의도 없다면서도 유화책 미공개…"韓 제안 방안 미국도 경청"
美 "인권침해 공급자에 덜 의존" 탈중국 공급망 역설…공동성명 대만도 거론
美, 한미일 '反中연대' 강조…북핵 '추가 유인책'에 촉각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의를 주최한 미국이 북핵 대응에는 원칙적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대(對)중국 견제를 위한 목소리를 높였다.

동북아 핵심 동맹인 한국과 일본을 한자리에 모아 중국·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대립 구도에서 '동맹 연대'를 강화하려는 데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12일(현지시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이번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는 북한이 핵실험·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철회를 위협하며 정세를 '대치 국면'으로 되돌리려는 와중에 개최돼 한미일 3자 차원의 새로운 대북 해법이 도출될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이후 공동기자회견에서 "전제조건 없이 만날 준비가 돼 있다", "북한에 적대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일단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의 최근 탄도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에 대한 분명한 위반이라고 지적한 뒤 "북한에 책임을 물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언급해 제재·압박 수단 역시 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날 3국 외교장관의 공동성명도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무력 시위를 규탄하고 기존의 원칙적 대북 기조를 재확인하는 정도의 메시지로 수렴됐다.

관심을 모았던 교착 타개를 위한 구체적 대북 유인책은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공개된 메시지만 놓고 봤을 때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이번 회의에서 대북 관여 방안도 실제 심도 있게 논의된 것으로 알려져 향후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고 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물밑 움직임이 전개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북한과의 관여를 가속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협의했다"고 밝혔다.

취재진의 관련 질문에도 "여러가지 방안이 있지만 현 단계에서 그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3국이 북한에 관여하기 위한 여러 현실적인 방안을 논의했으나 아직은 공개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외교부 당국자도 회견 이후 기자들과 만나 대북 관여와 관련해 "한국 측이 몇 가지 방안을 제안했고 그에 대해 미국이 상당히 경청했다"며 "협의를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미측의 의지가 좀 더 분명하게, 상당히 진정성 있게 전달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협의가 있었다"며 "수면 아래에서 드러내기는 빠르다"고도 전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한미일 대 북중러' 등 진영 경쟁 구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조짐도 이번 회의에서 엿볼 수 있다.

블링컨 장관은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든,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든, 규칙 기반의 질서를 저해하려는 이 지역 내 큰 국가들의 다른 행동이든…"이라고 거론하며 "공통 분모는 안보와 번영에 필수적인 기본적 원리가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함께 서서 우리 세 나라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규칙 기반의 질서를 저해'한다는 것은 보통 미국이 중국을 비판할 때 쓰는 표현이다.

북중러의 행동을 유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서 한미일 3자 공조를 강조한 것이다.

마침 북한에 주재하는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와 쑨훙량(孫洪量) 주북 중국대사대리도 전날 평양에서 만나 대북 관계를 논의하는 등 중러도 공동 대응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역내 주도권을 둘러싼 진영경쟁의 틀 내에서 북핵 문제를 다룬다면 해결이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외교가의 대체적 분석이다.

미국은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공급망 등의 분야에서 중국 견제를 위한 3국의 공조 필요성을 직설적으로 거론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날 3국이 경제안보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며 "반도체와 핵심광물 등에서 팬데믹으로 노출된 우리의 공급망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는 인권을 침해하고 환경 기준을 무시하는 공급자들에게 우리가 덜 의존하도록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을 침해하고 환경 기준을 무시하는 공급자'는 직접적으로 중국을 겨냥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날 3국 공동성명이 "민주적 가치와 보편적 인권에 대한 존중에 기반하여 핵심 및 신흥 기술의 혁신을 촉진"한다고 언급한 것 역시 중국의 첨단기술 활용이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미국의 인식이 반영됐을 수 있다.

3국 공동성명에서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간주하며 극도로 민감하게 여기는 대만 문제가 거론된 점도 주목된다.

3국 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 표현만 놓고 보면 지난해 5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및 같은 해 12월 한미안보협의회(SCM) 공동성명과 문구가 같지만, 중국은 대만 문제가 거론됐다는 것만으로 반발할 소지가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