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폭력에 짓밟힌 소녀 또는 자신이 겪었던 피해를 세상에 소리 내 알린 투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말을 떠올리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생존자들 각자의 삶은 단편적인 두 가지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박문칠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보드랍게'는 1928년 음력 4월,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태어나 여든두 해의 시간을 살아온 고(故) 김순악 씨의 인생을 오롯이 담아냈다.
열여섯의 봄날, 대구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기차에 몸을 실은 한 소녀는 수십 년간 그날의 이야기를 가슴 깊숙이 묻어둔 채 '악시게'(억세게) 삶을 견뎌내 왔다.
'이미 버린 몸띠(몸뚱아리)'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전부였던 유곽과 술집에서 돈을 벌고,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로 '색시 장사'를, 15년간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그 삶의 궤적에서 사다코, 데루코,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술쟁이, 할매, 순악씨까지.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던 그는 1999년 일평생 감춰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뒤 십 년여의 생을 운동가이자 예술가, 누군가의 할머니이자 친구로서 살았다.
"내 이야기 해가지고(내 이야기를 할 때) '아이고, 그랬구나, 참 애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 김순악 씨가 살아생전 남겼던 구술 증언 속 구절에서 끌어온 제목처럼 영화는 '동네에서 제일 가난했던' 집의 딸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부터 일본군 '위안부' 당시의 피해 경험, 그 이후의 삶을 어떤 과장이나 미화 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담아냈다.
박 감독은 9일 오후 시사회에 이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순악 할머니는 전쟁 당시 당했던 피해나 투사가 된 이후의 모습, 그 사이의 시간을 보여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 사람을 온전히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만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드랍게'는) 이제까지의 일본군 '위안부' 소재 작품들과는 다른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보고 나면 따뜻한 위로와 마음의 위안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김순악 씨의 이야기를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미투 운동 당사자 세 명의 목소리로 전하며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박 감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여성에 대한 현재의 차별·폭력과도 이어지는 문제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틀을 확장해나갔으면 했다"고 생각을 밝혔다.
미투 운동 당사자로 출연한 박혜정 씨는 "(김순악) 할머니가 살아오신 모습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제가 미투를 준비하며 들끓고 힘들었던 마음들이 위안을 많이 받았다"며 "이제는 누구나 일본군 '위안부'를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미투 운동도 인식의 변화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시민모임의 안이정선 씨는 "할머니들께서 늘 '나를 잊어버리지 마라. 내 아픔을 세상에 드러낸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며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