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015년 한국정부 차원 진상규명 전담기구 역할 수행
日 산업유산 등재 등 사안서 활약…'한시 조직' 한계로 폐지
[日강제동원위 11년사] ①'35자' 이름도 긴 '역사전쟁 야전부대'
[※ 편집자주 =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이었던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한일 관계가 또 다른 암초를 만났습니다.

제2, 제3의 사도광산이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다룰 정부 전담기구의 필요성도 제기됩니다.

실제로 2004년부터 11년간 정부 차원의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작업을 최전선에서 수행했던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대중적 인지도도 높지 않았고 한시적 기구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적잖은 성과를 낸 위원회의 역사를 돌아보고, 당시 재직한 이들이 전하는 한일 역사대응의 치열한 현장 이야기를 담은 세 편의 기사를 일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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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일본 규슈(九州)·야마구치(山口) 지역 산업시설과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가시화하자 한국 외교당국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여기에는 '군함도'로 알려진 하시마(端島)를 비롯해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돼 노역한 현장이 포함됐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시대 산업혁명 유산'임을 내세우며 등재 시기를 전쟁 이전인 1850~1910년으로 좁히는 방식으로 강제동원 논란을 비켜가려 했다.

외교부를 중심으로 몇몇 전문가들이 모인 대응조직이 꾸려졌다.

등재 신청지의 강제동원 역사에 대한 사실관계를 수집하고 외교대응 전략을 짰다.

등재까지는 막을 수 없더라도 '강제동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반영되게 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전문가들이 제공한 '팩트'를 가공해 일본 측과 협상에서 활용하고,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들과도 공유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결국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일부 시설에서 강제노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한 조치를 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아야 했다.

'전체 역사를 반영하게 한다'는 한국 정부의 목표는 달성된 셈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당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대응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곳 중 하나가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였다.

'35자'의 긴 이름이 붙은 이 위원회가 제공한 진상조사 결과 등 사실관계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는 무게가 실려 관련국들에 전달됐다.

이런 역할을 한 위원회는 그해 말 활동기간 만료로 문을 닫았다.

이후 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일본은 사도광산이라는 또다른 강제동원 현장을 '산업유산'으로만 포장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 하고 있다.

강제동원이라는 한일 양국의 오랜 난제를 최전선에서 다룬 정부 기구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유산이 향후 유사한 문제 대응에 제대로 활용될지는 숙제로 남는다.

[日강제동원위 11년사] ①'35자' 이름도 긴 '역사전쟁 야전부대'
◇ 시민사회 요구로 출발…日 전쟁피해국 중 정부차원 진상규명 최초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이 열렸다.

한국 등 일본군의 전쟁범죄 피해 당사국 시민사회가 함께 모여 군 위안부 동원을 중심으로 일본의 책임을 검증하는 민간 행사였다.

법정은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규정하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일제 강제동원을 한일 양국만이 아닌 여러 피해국의 문제로 확대하고 국제 연대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국제법정의 파장은 컸다.

국제법정 개최를 전후해 국내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특별법을 제정해 일제 강제동원의 진상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자는 움직임이 커졌다.

이런 여론에 부응해 국회에서는 2001년 10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고, 2년여가 지난 2004년 2월 마침내 본회의를 통과했다.

특별법은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 시기까지 군인·군무원·노무자·군 위안부 등으로 일제에 강제동원된 이들의 피해 진상을 규명한다는 목표를 담았다.

정부 차원의 정확한 진상 규명이 있어야만 '사실'을 근거로 일본의 역사 부정을 반박할 수 있고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도 치유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를 전담할 기구로 2004년 11월 국무총리 소속으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됐다.

일본이 일으킨 아태전쟁 관련국 가운데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공식 기관을 꾸려 피해 진상규명을 시도한 사례는 한국의 강제동원위원회가 최초라고 한다.

진상규명으로 확인된 피해자 중 한반도 외 지역으로 동원된 이들에게는 정부가 위로금 지급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시행한다는 목적 아래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도 2008년 6월 출범했다.

2010년 4월에는 두 기관의 업무를 통합한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신설됐다.

위원회의 존재는 강제동원 진상을 밝히고자 노력하던 일본 내 양심적 시민사회와 학계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일본의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비판 성명을 내는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는 애초 한국의 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고자 일본 내 여러 지역 단체들이 뭉친 연대체였다.

이런 단체들은 위원회의 현지 조사와 각종 자료 입수에 적극 협조하며 한일 역사연대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 '연인원 780만명' 속 피해자들 실체 찾기…철저한 사실에 근거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뒤 해방 전까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연인원으로 780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강제동원위원회의 역할은 객관적 사료와 피해자·유족 진술을 토대로 피해사실을 구체적으로 검증해 780만명이라는 '큰 숫자' 속에 뭉뚱그려진 개개인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피해자 1명당 구술기록 등 조사 자료가 박스 하나를 채울 정도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옛 기억이 이미 희미해진 고령의 피해자를 찾아가 장시간 진술을 듣고, 같은 시기 마을에서 동원된 다른 이들이 있는지도 탐문해 사실관계의 조각을 맞춰 나갔다.

동원자 명부와 같은 자료가 있으면 진술이 이와 일치하는지 교차검증하는 등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한 개인의 피해조사가 완료됐다.

위원회 폐지를 앞두고 작성된 활동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위원회는 11년간 강제동원 피해 신고 22만6천583건을 조사했고, 특정 지역·전범기업 등 큰 주제를 다룬 진상조사 32건도 완료했다.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피해자 일부도 위원회 활동 당시 이미 확인됐다.

2015년 위원회가 기존에 완료한 피해조사 내역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148명의 존재가 드러났다.

사도광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총 1천200명가량으로 추산된다.

2천명이 넘는다는 추정치도 있다.

논란 끝에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대해서도 그보다 앞선 2012년 이미 위원회 차원의 기초조사 보고서가 공개돼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 일본 정부가 하시마 등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던 상황이어서 보고서의 파장은 일본 현지에까지 미쳤다.

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가 확인된 사망자·행방불명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 생존자 등 7만2천631건에 대해 정부 위로금을 지급했다.

일본과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돼 현지에서 사망한 이들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고자 일본·러시아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도 위원회가 핵심 역할을 했다.

진상규명에 필요한 각종 자료 입수도 위원회의 주요 성과 중 하나다.

국가기록원 등 국내 기관에서 잠자던 자료를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와 직접 외교협상을 벌여 공탁금 명부, 후생연금 명부 등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한 일본 측 중요 기록을 다수 받기도 했다.

[日강제동원위 11년사] ①'35자' 이름도 긴 '역사전쟁 야전부대'
◇ '시한부 조직' 태생적 한계…산적한 과제 남기고 폐지
강제동원위원회는 다루는 사안의 규모에 비해 짧은 활동 연한이 법으로 정해진 한시조직이라는 점에서 출발부터 한계를 안고 있었다.

6개월 이내 범위에서 1~2차례 기간을 연장하는 조항을 활용하고, 몇 차례 법 개정으로 활동기간을 늘렸으나 결국 산적한 미결과제를 남긴 채 2015년 12월 문을 닫았다.

새로운 자료가 지속적으로 입수돼 강제동원 진상에 한층 더 정확히 다가갈 여지가 충분했던 상황이었다.

일본 시민단체들까지 나서 한국 정부와 국회에 위원회 존속을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원회 폐지 후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업무를 넘겨받았고, 행안부 산하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도 학술연구·조사, 희생자 추도사업 등 과거 위원회 기능을 소관 업무로 뒀다.

그러나 행안부 지원단은 간부 등 소속 공무원이 인사철이면 바뀌기 일쑤여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이 떨어지고, 재단의 진상규명 사업은 민간 연구자들에게 용역을 주는 수준이라서 이전 위원회가 수행한 정부 차원의 공식 조사와는 대외적 무게감이 다르다는 게 전직 위원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여전히 피해조사와 지원금 신청을 원하는 이는 많지만, 위원회 폐지 이후 관련 업무가 이뤄지지 않아 엉뚱한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현재 활동 중인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의 진실규명 신청이 2천여건 접수됐으나 소관 업무가 아니어서 각하 대상이다.

이 때문에 국회에도 강제동원위원회를 다시 가동해 추가 피해조사와 지원을 담당하도록 하는 특별법 개정안이 2건 발의돼 있다.

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조사기구이자 희생자 추모시설인 '야드 바셈'(Yad Bashem, 이름을 기억하라)을 1953년부터 상설 정부기관으로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피해 신고를 받는다.

[日강제동원위 11년사] ①'35자' 이름도 긴 '역사전쟁 야전부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