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연구자 박종진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쓴 '개경'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 수도 '개성'…한양과 무엇이 다를까
고려 수도가 개성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남북이 분단되면서 한국 역사학계는 한동안 개성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나마 고려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1990년대 이후 개성에 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됐다.

고려사 연구자인 박종진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쓴 '개경'(開京)은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도시 개성의 공간 특성과 변화상을 논한 책이다.

그는 1996년 한국역사연구회 개경사연구반에 참여했고,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개성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한 책을 여러 권 내놓았다.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이듬해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겼다.

저자는 왕건의 개성 천도를 정치적 안정을 고려한 현실적 선택으로 평가한다.

당시 왕건은 궁예를 내몰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반대파를 제압하고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천도는 국면을 전환하기 좋은 방책이었다.

저자는 왕건이 애초에 새 수도로 삼고자 한 도시가 서경, 즉 평양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본인의 근거지였고 궁예가 한때 수도로 사용해 기반 시설이 남은 개성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이어 개성에 풍수지리가 적용됐다는 설에 대해 "태조 왕건은 서경의 지세를 개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며 "풍수지리는 개경 천도의 직접적 배경이 아니라 천도 이후 수도 개경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강조됐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개성의 자연과 지리적 범위는 물론 궁궐, 관청, 태묘(太廟·종묘)와 사직, 국자감과 성균관, 경제 제도, 시장, 주거, 절, 왕릉 등을 상세히 소개한다.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 수도 '개성'…한양과 무엇이 다를까
그는 개경이 수도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춘 시기를 나성(羅城)이 축조된 1029년으로 본다.

무려 110년에 걸쳐 도시가 조성된 셈이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궁궐과 종묘, 성곽이 들어선 조선 한양과는 사뭇 달랐다.

"개경은 일관된 계획이나 방향에 따라 완성된 도시가 아니다.

태조부터 현종(재위 1010∼1031) 때까지 주요 시설이 창건되고 보완됐으며, 공간이 확대되고 경관도 계속 변했다.

"
나성은 한양도성처럼 개경을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졌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성문은 25개였다.

반면 한양도성은 돌을 활용한 석성이고, 성문도 8개에 불과했다.

개경과 한양의 또 다른 차이점은 절의 개수였다.

불교를 중시한 고려 개경에는 수백 개의 절이 있었으나, 조선은 유교를 숭상해 한양에 많은 절을 두지 않았다.

저자는 "개경의 절은 종교적 기능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으로도 매우 중요했다"며 "개경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절들은 개경 안팎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 됐다"고 말한다.

두 도시에서 주요 시설의 위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장은 궁궐 남쪽에 있었고, 종묘와 사직은 각각 궁궐 동쪽과 서쪽에 자리했다.

다만 고려 태묘는 특이하게도 나성 바깥에 있었다.

저자는 "개경의 도성 형태, 궁궐·관청·시장 위치는 한양에 큰 영향을 줬다"며 "조선 수도가 한양으로 정착되면서 개성은 지방도시가 됐지만, 한양을 보좌하는 중요한 배후도시의 위상을 유지했다"고 강조한다.

눌와. 400쪽. 2만4천원.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 수도 '개성'…한양과 무엇이 다를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