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 사도(佐渡) 광산이라는 새로운 악재가 또 등장했다.
과거사부터 영토, 무역, 환경까지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한일 양국의 전선이 세계유산이라는 문화 영역으로까지 추가 확대된 셈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28일 저녁 총리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의 반발을 고려해 추천 보류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막판에 추천을 강행한 것이다.
한일관계는 이미 '수교 이래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일본의 이번 조치는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양국 관계의 가장 큰 난제로는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가 꼽힌다.
한국 대법원은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등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이는 자산매각 명령으로도 이어졌지만, 일본은 1965년 한일 수교 당시 체결된 청구권 협정으로 징용 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배상뿐 아니라 2015년 위안부 합의까지 함께 걸려있다.
한일 양국은 당시 합의를 통해 조성된 화해·치유 재단 잔여 기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징용 및 위안부 배상의 경우 유사한 판례들이 속속 나오고 있고 현금화 강제집행 절차를 밟고 있어 사실상 '시한폭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11월 김창룡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트집 잡아 한미일 공동기자회견을 무산시키는 잡음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설 선물에 독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주한일본대사관이 이를 반송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제와 환경 분야에서도 삐걱대는 모습이다.
2019년 일본이 수출할 때 승인 절차 간소화 혜택을 인정하는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했고, 후쿠시마(福島)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여부를 놓고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에 새로운 악재로 등장한 사도 광산은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가 얽혀있어 양국 정부가 물러설 수 없는 쟁점이기도 하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도 광산의 경우 우리가 계속 문제를 제기한 부분이고, 강제징용과도 연계가 돼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일본 자민당 내 강경파 세력이 사도 광산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역사 왜곡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문제인데, 이러한 기조가 달라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지적했다.
2015년 이른바 '군함도'로 대표되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 산업시설이 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에도 한일 양국은 사활을 건 외교전을 펼쳤는데, 이 같은 모습이 재현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당시 한국 정부는 등재 결정권을 가진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과 정상회담을 비롯해 각급에서 외교채널을 총동원해 우리의 입장을 전하고, 학계를 통해 등재의 부적절성과 강제징용 피해 등을 알렸다.
이번에도 이에 준하는 전방위적인 외교 총력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본이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회의회(ICOMOS·이코모스)의 권고에도 전시 시설에 노동 강요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아 지난해 개선 촉구 결정문까지 받았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부각할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이날 일본 정부의 사도 광산 추천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대변인 성명을 내고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이러한 시도를 중단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등재 여부가 결정되는 내년 6월까지 첨예한 외교전이 예상되는 가운데 한일관계를 풀어낼 단기적인 해법은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 정부 모두 여론을 의식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데다가 사실상 양국 지도부 간의 교류가 끊어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최 연구위원은 "결국 일본 내부의 자성적인 목소리를 기대해야 하는데 단기적으로는 어렵다"며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일본의 주류인 자민당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