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없는 제품은 한꺼번에 사둬요. 지금도 치약 8개랑 1년 반 동안 쓰고도 남을 샴푸가 집에 쌓여 있어요."

워싱턴포스트는 "인플레이션이 시민들의 소비 습관과 사고 방식을 변화시킨다"며 고물가가 일상이 된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니콜라스 모나코는 WP와의 인터뷰에서 "할인 행사 때마다 제품을 구매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올라 있는 가격에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하루라도 물가가 저렴할 때 제품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고물가 현상은 수십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50.9% 상승했다. 2017년 상승률(24.8%)에서 두 배 이상 오른 셈이다. 미국에선 지난해 12월 CPI가 전년 동기 대비 7% 오르며 40년 만에 최고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지만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만성화되어 있다고 WP는 전했다.

장기화되는 인플레이션은 아르헨티나인들의 소비 습관을 바꿔놨다. 다음 날 제품 가격이 더 올라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이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은퇴자인 애나 비에니는 "가능한 한 많은 물건을 비축하려고 한다"며 "한때 참치캔 48개와 몇 달 동안 충분히 요리할 수 있는 식초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소비컨설팅업체 W를 운영하는 기예르모 올리베토는 이를 "인플레이션 문화"라고 설명했다. 이어 "예금 금리보다 높은 주당 1%의 인플레이션 시기에 은행에 있는 돈은 하루가 다르게 가치가 떨어진다"며 "오늘의 페소(아르헨티나의 통화)는 내일이면 가치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소비 문화를 자극한다"고 했다.

가파른 물가 상승세 탓에 아르헨티나에선 임금 협상이 수 차례 이어진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임금 수준을 산출하기 위해서다. 분기별로 임금 재협상을 하기도 한다. WP는 "고물가 경제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소득 수준과 물가 상승세를 일치시키는 것일지 모른다"며 "물가 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인상은 사실상의 임금 삭감"이라고 했다.

고물가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가치에 대한 개념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싸다고 '판단'되는 제품을 발견하면 사재기에 나서기 때문이다. 비에니는 "아르헨티나에선 가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올리베토는 "모든 소매업체들은 가격을 너무 많이 올리면 나중에 할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격을 조금씩 인상한다"며 "아르헨티나에서 실제 상품의 가격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