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진단업체인 피씨엘이 대한적십자사가 발주하는 546억원 규모의 혈액선별기 물량을 따내기 위해 글로벌 기업인 애보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 회사의 매출 차이가 763배(2020년 기준 애보트 41조원, 피씨엘 537억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란 평가가 나온다. 피씨엘은 적십자 물량을 수주한 뒤 해외 시장 공략에 본격 나선다는 계획이다.

15년 만에 장비 교체 나선 적십자

16일 조달청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적십자가 실시한 혈액선별기 납품 입찰에 애보트와 피씨엘 등 두 곳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혈액선별기는 수혈한 혈액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B형 간염 등 감염병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 등을 확인하는 면역검사 장비다. 국내 물량의 90% 이상을 적십자가 쓰는 이유다.

적십자는 두 회사 제품에 대한 성능 평가를 거쳐 이르면 다음달 납품 업체를 선정할 계획이다. 제품은 2027년 5월까지 5년여 동안 순차적으로 서울, 대전, 부산에 있는 적십자 혈액검사센터에 공급된다.

적십자가 혈액선별기 교체에 나선 건 기존 장비가 너무 노후화됐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현재 쓰고 있는 장비(애보트 16대, 지멘스헬시니어스 13대)는 2007년부터 15년째 쓰고 있다.

적십자는 2016년부터 교체를 추진했으나 가격 등이 맞지 않아 실제 교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비 노후화 정도를 감안할 때 도입을 더 늦추기 어려운 만큼 이번에는 낙찰 업체를 선정할 것으로 업계에선 예상하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

이번 입찰은 애보트와 피씨엘 2파전으로 진행된다. 15년 전 입찰 때 애보트와 납품 물량을 양분했던 지멘스헬시니어스는 불참했다.

‘덩치’로 보면 애보트와 피씨엘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애보트는 지난해 1~9월에만 38조원의 매출을 올린 글로벌 헬스케어업계의 ‘맏형’ 중 하나다. 같은 기간 매 출 351억원을 올린 피씨엘이 겨룰 만한 상대가 아니다.

시야를 이번 입찰 품목으로 좁혀도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긴 마찬가지다. 애보트는 스위스 로슈 등과 함께 연 5조원 규모의 글로벌 혈액선별 시장을 나눠 먹고 있는 과점 업체 중 하나다. 반면 피씨엘은 2020년 한마음혈액원에 한 대를 납품한 게 혈액선별기 판매 실적의 전부다. 현재 매출의 98%는 코로나19 신속진단키트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피씨엘은 수주에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애보트보다 성능이 뛰어난 혈액선별기를 개발한 데다 지멘스헬시니어스와 LG화학 등 ‘우군’도 확보했다는 이유에서다. 피씨엘 관계자는 “이번 입찰에 내놓은 혈액선별기 ‘하이수’는 시간당 540개 검체를 검사할 수 있다”며 “애보트가 국내에서 허가받은 제품인 ‘얼리니티아이’(시간당 200개 검사)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했다. 애보트는 시간당 600개 검체를 검사할 수 있는 ‘얼리니티에스’ 제품군을 개발했지만 국내 허가를 받지 않아 해당 제품으로는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피씨엘이 진단시약 공급을 독점하지 않고 LG화학 및 지멘스헬시니어스 제품을 함께 쓰기로 한 것도 입찰에 ‘플러스’ 요인이 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현재 적십자가 쓰고 있는 애보트 기기는 애보트 시약만 인식한다. 일각에서 “애보트가 언제든 시약 가격을 올릴 수 있고,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이 생기면 제때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는 이유다.

피씨엘 관계자는 “경쟁업체 제품에 밀리지 않는 기기를 개발한데다 든든한 우군도 확보한 만큼 승산이 있다”며 “적십자 물량을 따내면 주요 기관 납품 경력(트랙 레코드)이 생기는 만큼 해외 진출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