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총리 거취 연관…대통령직으로 이동시 내각 존속 불투명
정계 일각서 '조기총선론'도 고개…외신 "경제 최대 위기 요인"

[특파원 시선] 이탈리아에 드리운 또다른 정국 불안의 그림자
이탈리아에 마리오 드라기(74) 총리 내각이 들어선 지 1년도 안 돼 다시 정국 불안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내년 1월 제14대 공화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폭하는 모양새다.

세르조 마타렐라(80) 대통령은 7년 임기를 마치고 내년 2월 물러날 것으로 전망된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이미 연임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마리오 드라기 총리의 거취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현지 언론에서는 드라기 총리를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하고 있다.

경륜과 능력 등을 종합해볼 때 헌법 정신을 받들어 국민 통합을 이루는 대통령직에 적임자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드라기 총리 본인도 대통령직에 대한 의지가 없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 22일(현지시간) 연말 기자회견에서 향후 거취를 묻는 말에 "내 개인적인 운명은 중요하지 않다.

특별한 야심은 없다"면서도 "누가 그 자리(총리)에 있든지 간에 국정이 지속될 여건은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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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언론과 외신들은 이 발언을 두고 일제히 '대통령직에 관심을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드라기 총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가정해 향후 정국 방향을 조망하는 분석 기사도 자주 눈에 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경우 최대 관심사는 드라기 총리가 이끌어온 '좌우 동거' 연립정부의 운명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출신인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와중이던 지난 1월 주세페 콘테 총리 내각이 내부 불협화음으로 붕괴하자 마타렐라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지명돼 정국 위기의 불을 끄는 긴급 소방수로 등판했다.

이후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무지개 거국 내각'을 구성해 코로나19 대응, 유럽연합(EU) 회복기금을 토대로 한 국가 사회·경제개혁 청사진 수립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무난하게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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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성향과 정책 지향점, 지지 기반 등이 판이한 정당들이 어색하게 손을 잡은 만큼 크고 작은 잡음이 없지 않았으나 국민적 지지가 뒷받침된 드라기 총리의 리더십이 연정 위기를 허락지 않았다.

바람 잘 날 없는 이탈리아 정가에서 근래 보기 드문 평화기였다는 평도 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드라기 없는 내각의 지속가능성에 의문부호를 다는 분석도 많다.

드라기의 카리스마 아래 억눌렸던 갈등 요인이 분출하며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다.

현재 그를 대체할 만한 후임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부정적인 요소다.

정가 안팎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조기총선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2018년 총선을 통해 구성된 현 의회의 임기는 2023년까지다.

현 연립내각에 참여하는 주요 정당들도 대통령 선거를 도화선으로 안갯속 정국 위기가 도래할 개연성을 예의주시하면서 동시에 조기 총선까지 염두에 둔 이해득실 분석에 분주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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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극우 정당 동맹(Lega)과 이탈리아형제들(FdI)을 필두로 한 우파 연합이 근소한 차이로 과반을 점하는 양상이지만 민주당(PD)을 중심으로 한 좌파 진영이 꾸준히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있어 섣불리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다.

현지에서는 팬데믹 위기가 지속하는 가운데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 상황이 전개될 경우 간신히 회복 국면에 진입한 이탈리아 경제가 다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하다.

1946년 공화국 수립 이래 정권이 60여 차례 바뀔 정도로 고질적인 정치 불안정성이 이번에도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염려다.

드라기 총리가 취임 후 역점을 둔 사회·경제시스템 개혁과 이를 통한 성장 전략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도 거론된다.

해외에서도 드라기 총리의 거취를 둘러싼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29일자 기사에서 "드라기 총리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은 이탈리아 경제의 중대한 위기 요인이며, 또한 이는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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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기총선으로 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제동을 걸 만한 요인들도 있다.

작년 9월 헌법 개정으로 다음 선거부터 의원 수가 상원은 315명에서 200명(종신 상원의원 6명 제외)으로, 하원은 630명에서 400명으로 각각 줄게 되면서 재선을 장담할 수 없게 된 현직 의원들로서는 임기를 마치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높다.

드라기 총리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60%에 육박할 정도로 광범위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도 고려 요소다.

이탈리아 경제계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드라기 총리의 직무 수행 유지를 요청했다.

이 때문에 이념 성향을 떠나 각 정당 내에는 드라기 총리 내각이 2023년 총선 때까지 존속하는 것을 선호하는 의원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에는 마타렐라 대통령 유임을 희망하는 목소리도 정계 일각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으나 본인이 연임 포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상황이라 이러한 시도가 선거 구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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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출 투표는 내년 1월 셋째 주께 개시될 예정이다.

관련 법상 선거권은 상원 321명, 하원 630명, 20개 주(州) 대표 58명 등 총 1천9명에게 주어진다.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선출되며, 세 차례 투표에서도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네 번째 투표부터는 과반 득표자를 뽑게 된다.

1971년 6대 대통령 선출 때의 13차례 투표가 최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관례상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 대외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아 안갯속에서 비밀 투표 방식으로 진행되는 데다 최종 선출까지 수일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교황 선출 투표인 '콘클라베'(Conclave)에 비유되기도 한다.

선거 구도상 이탈리아 대통령은 좌·우파 정당을 아우르는 지지를 받아야 당선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통상 투표를 앞두고 각 정당 혹은 이념적 정파 사이에 치열한 '권력 게임'이 전개된다.

이번에도 좌파든, 우파든 어느 한쪽으로 분류되는 표가 500표를 넘지 않아 대통령 선출을 위해선 두 정파 간 타협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드라기 총리 외에 3선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5), 헌정 역사상 첫 여성 재판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마르타 카르타비아(56) 현 법무장관, 전문 외교 관료 출신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정보기관 수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엘리자베타 벨로니(62) 등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