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관리 횡포 탓에 고된 남자 일까지 짊어진 해녀 '강인한 제주 여성' 인식…역사적 배경 속에 이해해야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해봐야 태풍 한 번 불면 농사를 망치니 먹고 살 방도가 바다밖에 없었어…."
오랜 세월 거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한 늙은 해녀의 말대로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 제주는 그래왔다.
토양과 기후 등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환경 탓에 제주 사람들은 바다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이자 각종 먹을거리를 주는 바다를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렀다.
이 바당밭에서 산소통 같은 어떤 잠수장비 없이 그저 한 번의 호흡만으로 물질하며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는 이제 제주의 상징이 됐다.
해녀는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 힘든 물질을 해왔던 것일까.
ㅈ+ㆍ+ㅁ녀(잠녀, 潛女) 또는 잠수(潛嫂)로 불렸던 해녀의 기원에 대해 사람들은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또 다른 학자들은 삼국사기 등에 '섭라(涉羅·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잠수조업이 시작됐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시작이 어떠했든 신체적 조건상 깊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남자의 몫이었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수심 20m 깊은 바닷속까지 잠수해 전복을 캐는 일은 매우 험한 일이었고, 여자들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복을 캐고 고기잡이를 하는 등 각종 어업에는 대부분 남성이 종사했고, 이들을 통칭 '포작인'(鮑作人)이라고 일컬었다.
여성들은 보통 해안가에서 전복이 아닌 미역을 땄다.
실제로 역사서에서도 포작인이란 용어는 해녀보다 먼저 등장했다.
문헌에는 조선 전기인 성종조(1457∼1494년)에 포작인이라는 말이 나타났고, 현재의 해녀를 지칭하는 '잠녀'라는 말은 조선 중기에 들어 등장했다.
해녀의 원래 이름은 잠녀였다.
말 그대로 잠수하는 여성이란 뜻으로,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오늘날 해녀라는 말로 대체됐다.
그렇다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때 어떤 사연이 있길래 여성이 그 험한 바닷속까지 들어가 전복을 따야 했던 것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이 조정에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면 그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지아비는 포작과 선원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로 생활하면서 일 년 내내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목자의 10배나 됩니다.
일 년을 통틀어 합산하면 남자가 포작으로 바치는 것이 20여 필, 여자가 바치는 것도 7∼8필에 이르니 부부가 바치는 것이 30여 필에 달합니다.
'
포작인과 잠녀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포작인은 단순히 조정에 진상할 전복이나 해산물만 채취한 것은 아니었다.
진상선 등 당시 목숨을 건 뱃일 요역(조선시대 백성에게 대가 없이 부과하던 일)에 동원됐다.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했던 '6고역'(六苦役)이 있었는데 이는 진상을 위해 전복을 캐 올리는 포작역(鮑作役), 해조류를 채취했던 잠녀역(潛女役), 말을 기르던 목자역(牧子役, 말테우리), 귤을 재배하던 과원역(果員役), 진상품을 운반하는 배의 선원 역할을 하는 선격역(船格役, 곁꾼), 관청의 땅을 경작해주던 답한역(畓漢役) 등 6가지다.
포작인은 이 가운데 포작역과 선격역 등 이중의 고역을 떠안아야 했다.
심지어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 수군(水軍)으로 동원되기도 하면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거나 왜구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등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조정에 바쳐야 할 진상품 부담이 너무나 과중했고, 중간에서 가로채는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열심히 살아도 삶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 포작인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 떠돌면서 유랑했다.
포작인의 수가 줄어들자 대신 그 역할을 제주에 남은 여자들이 짊어져야 했다.
진상해야 할 전복의 수가 많아 할당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악순환은 반복됐다.
제주 여인들은 포작인의 아내가 되는 것을 기피했고, 결국 포작인들은 홀아비로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 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남자아이 낳기를 꺼렸고 대신 딸을 낳길 원했다고 한다.
부모들은 딸을 낳으면 '이 애는 커서 나에게 잘 효도할 아이'라고 하며 기뻐했지만, 아들을 낳으면 '이 애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곧 바다 고래의 먹이가 될 것'이라 한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부(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에 전해져 오는 내용이다.
1600년대 간행된 김상헌의 제주 기행문인 '남사록'에 기록된 당시 제주 인구가 2만2천990명으로, 남녀의 성비를 보면 남자가 9천530명인 데 비해 여자는 1만3천460명으로 남녀 성비가 0.7대 1로 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아있는 남자들이 해도 젊은 남자들이 아닌 나이 많은 노인과 아이들이 주를 이뤘다.
남자들이 주로 했던 전복을 잡아 올리는 포작역을 해녀들이 떠안아야 했고, 남자들이 도맡았던 군역을 여자들이 대신 지면서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정(女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남사록'에는 당시 남정(男丁)의 수는 500명이지만 여정의 수는 800명으로 기록돼 있다.
결국 인구이탈을 막기 위해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리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폈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제주 사람들은 200년 가까이 섬 안에 갇혀 폐쇄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제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 섬 안에 갇혀 살면서 제주도가 '여다(女多)의 섬'이 되고, 해녀가 그 모진 삶을 이어가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제주 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 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싸우며 밭에서 일하다가도 물때가 되면 손에 든 호미를 내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강인한 제주 여성, 해녀들의 생명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이해할 수 있다.
월요일인 10일에도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며 한파가 이어지겠다.9일 기상청에 따르면 10일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5도에서 영하 2도 사이를 기록하겠다.낮 최고기온은 0∼7도로 예보됐으나,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지겠다.아침까지 제주도에 비 또는 눈이 내리겠고, 다음 날 오전까지 전남 서해안, 충남 서해안, 충남권 북부 내륙, 충북, 전북 서해안에도 가끔 눈이 내리겠다. 9∼10일 예상 적설량은 충남 서해안·전남 서해안·전북 서해안·제주도 중산간·산지 1cm 내외, 세종·충남 북부 내륙·충북 1cm 미만이다. 같은 기간 예상 강수량은 충남 서해안·전남 서해안·전북 서해안 1㎜ 내외, 세종·충남 북부 내륙·충북 1㎜ 미만, 제주도 5㎜ 미만이다.해안과 산지, 제주도는 바람이 순간풍속 55㎞/h(15m/s) 이상으로 강하게 불겠다.9일 밤까지 동해 중부 바깥 먼바다에, 10일 새벽까지 동해남부 바깥 먼바다에 바람이 30∼60㎞/h(9∼16m/s)로 매우 강하게 불고 물결이 1.5∼4.0m로 매우 높게 일겠다. 10일 오전부터 다시 동해 중부 먼바다에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고, 물결이 매우 높게 일면서 풍랑특보가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한파는 화요일인 11일 낮부터 점차 누그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11일 아침 기온은 평년보다 3∼10도가량 낮지만, 낮부터 차차 올라 평년 수준을 회복할 전망이다.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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