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명가(名家)’로 불리던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다. 한때 펀드매니저들의 사관학교로 불릴 만큼 새로운 투자 트렌드를 이끌던 국내 최장수 자산운용사지만 스타매니저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난 데다 상장지수펀드(ETF)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새로운 투자 트렌드에서 뒤처지며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흔들리는 '펀드 명가'…한투운용에 무슨 일이

인재집합소는 옛말

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순자산은 62조9145억원. 2015년(34조7820억원) 이후 8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순자산 1위 운용사인 삼성자산운용을 추격해온 미래에셋자산운용(108%) KB자산운용(125%) 등 다른 주요 운용사에 뒤처진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1974년 국내 최초 투자신탁회사로 출범한 최장수 자산운용사다. 대한투자신탁(1977년) 국민투자신탁(1982년)과 함께 삼투신으로 불리며 국내 펀드시장의 토대를 닦아왔다. ‘한투의 힘’은 돈을 굴리는 인재였다. 업계 최초로 최고투자책임자(CIO)라는 직급을 도입했을 만큼 인재를 확보할 인사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갖췄다. 박종규 전 우리자산운용 대표, 김석규 전 GS자산운용 사장, 장동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CIO, 강신우 한국투자공사(KIC) CIO, 박현준 씨앗자산운용 대표 등 업계 대표 선수 상당수가 한투 출신이다. 한투 출신 한 고위 관계자는 “한투의 힘은 액티브 명가로 불릴 만한 펀드매니저들의 탄탄한 실력이었다”며 “인재를 확보하지 못한 인사 실패가 현재 한투가 보여주는 모습의 원인”이라고 했다.

최초에서 후발주자로

인재들이 운용하는 펀드는 업계에서 늘 주목받았다. 네비게이터, 삼성그룹주, 한국의 힘, 베트남, 유전 펀드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삼성그룹주펀드는 국내 첫 기업섹터 펀드로 새로운 투자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박현준 대표가 한투에 있으며 줄곧 운용해온 한국투자네비게이터펀드는 국내 공모펀드 가운데 유일하게 한 책임운용역이 10년 넘게 책임져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수익률도 탄탄했다. 펀드평가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27.3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당시 50개 운용사 가운데 가장 많은 펀드(178개)를 운용하고 있었음에도 설정액 1조원 이상인 대형 운용사 13곳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나타냈다. 설정액 5000억원 이상 운용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19곳 가운데 2위를 차지할 만큼 높은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펀드 수가 많은 대형 운용사일수록 평균 수익률을 높게 유지할 수 없는 것을 감안하면 독보적인 운용 성과를 낸 셈이다. 반면 올해 연초 이후 수익률은 4.28%(10월 말 기준)에 불과하다. 전체 운용사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보수적이고 역동성 떨어져”

핵심 인력이 이탈하며 존재감이 옅어지는 동안 새롭게 자리잡은 ETF, TDF 시장에선 크게 뒤처졌다. 2002년 10월 삼성자산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과 함께 처음 ETF를 상장시켰지만 후속 투자가 이어지지 않아 선두권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다. 지난달 말 기준 국내 ETF 시장 점유율은 삼성(45.36%) 미래(32.69%) KB(7.98%) 한투(5.07%) 순이다. 강력한 연금 투자 수단으로 성장한 TDF 시장에서도 은행, 보험사 등을 보유하지 않은 독립운용사라는 한계 탓에 미래(43.36%) 삼성(22.48%)에 이어 3위(13.01%)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특히 ETF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라며 “후발주자로서 선두권과의 격차를 줄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2013년부터 올해까지 유지해온 연기금 투자풀 주간운용사 자리 역시 미래에셋자산운용에 빼앗기며 사세가 더욱 위축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제대로 된 보상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인사 시스템과 보수적이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조직 분위기가 이어지는 한 지금 같은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