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웠던 유년 시절 '나같이 불쌍한 사람 도우며 살겠다' 다짐"
"남을 도울 때가 제일 재밌어. 장애인들을 도울 땐 걱정도 싹 사라져."
지난 28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에서 만난 박춘자(92) 할머니는 2008년 남한산성에서 등산객들에게 김밥을 팔아 모은 3억 원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해 화제가 됐던 기부계의 '대모'나 다름없다.
박 할머니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부와 나눔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2019년엔 유산 기부를 약정했고, 지난 5월엔 남은 재산의 절반가량인 2천만 원을 어린이재단에 추가로 기부했다.
한평생 올곧은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탓이었을까, 아흔이 넘은 할머니의 얼굴과 손은 주름투성이였지만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할머니의 눈빛은 반짝였고, 목소리에선 젊은이의 기백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묵묵히 일해 모은 거금을 쾌척한 이유가 궁금해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박 할머니는 힘들었던 유년기 이야기부터 꺼냈다.
1929년생인 박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 힘들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박 할머니는 당시 국민학생이던 10살쯤 생계를 위해 새벽부터 시장을 오가던 자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새벽 4시 첫 전차를 타고 밭에 가서 자두를 한 자루 따와 집에 가져놓은 뒤 등교했어. 그리고 학교를 마치면 새벽에 따온 자두나 시장에서 사 온 오징어를 가지고 극장 앞에 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팔았어. 내가 정말 불쌍하게 살았어."
스무 살이 되기 직전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남들에겐 쉬워 보이기만 했던 임신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성남으로 터전을 옮긴 박 할머니는 남한산성 길목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김밥을 말아 팔거나, 홍합을 손질해 끓여 소주 안주로 내놓았다.
가을엔 도토리로 묵을 쒀 장사했다.
1년 365일 사계절을 쉬지 않고 일해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
은행에 갈 시간도 없어 걸레에 돈을 싸 보관했을 정도였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칠 때도 박 할머니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때마다 '언젠가 나처럼 힘든 사람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고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박 할머니가 봉사, 기부와 인연이 처음 닿은 건 다름 아닌 성당에서였다.
"내가 자식이 있어, 형제자매가 있어. 너무 외로웠지. 그래서 성당엘 가게 됐고 거기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렇게 시작된 장애인 봉사는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요리해 밥을 먹여주고, 변 묻은 옷은 손수 빨아 다시 입혀줘 가며 돕다 보니 이제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박 할머니가 반평생 키운 장애인은 11명. 그중 4명은 아직도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박 할머니는 젊은 시절 돈이 모이면 집을 사뒀는데, 시간이 흘러 집값이 오르면 팔아 모두 기부하는 데 썼다.
박 할머니가 돕는 장애인 시설에 지원한 3억 원도 이렇게 마련됐다.
"그 돈으로 편하게 살수도 있지 않았냐"는 기자의 우문에 박 할머니는 "이 돈 벌어 다 어디다 쓰겠냐. 어릴 적 나같이 불쌍한 사람 돕겠다는 생각뿐이다"고 답했다.
박 할머니는 일평생 모은 돈은 사회에 내놓고 지금은 생활비 월 45만 원으로 살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기부문화 확산을 위해 꼭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묻자 할머니의 답은 간결했지만 명쾌했다.
"돈이 없어도 그런(기부) 정신만 가지면 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