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산은 책이다, 이생진
<사진 제공 : 노용복님>

산은 책이다

이생진

산은 뜻 깊은 책이다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수려한 문장
구름을 읽다가 바위 곁으로 가고
바위를 읽다가 다시 구름 곁으로 간다

[태헌의 한역]
山卽篇(산즉편)

山是何(산시하)
意深篇(의심편)
不借翻書勞(불차번서로)
可讀秀文連(가독수문련)
閱雲忽堪到巖傍(열운홀감도암방)
讀巖復能至雲邊(독암부능지운변)

[주석]
* 山卽篇(산즉편) : 산은 곧 책이다. ‘篇’은 본래 종이 대신 “글씨를 쓴 대쪽을 끈으로 엮어 맨 책”을 의미하던 글자였기 때문에, 역자가 이 한역시의 압운을 고려하여 ‘書(서)’를 대신해서 사용한 글자이다.
山是何(산시하) : 산은 무엇인가? 한역시의 행문(行文)을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설정한 의문문이다.
意深(의심) : 뜻이 깊다.
不借(불차) : 빌리지 않다. / 翻書(번서) : 책장을 넘기다. / 勞(노) : 수고하다, 수고. ※ 이 구절은 원시의 “책장을 넘기지 않아도”를 약간 의역하여 표현한 것이다.
可讀(가독) : 읽을 수 있다, 읽을 만하다. / 秀文(수문) : 빼어난 문장, 수려한 문장. / 連(연) : 이어지다, 잇닿다. 한역시의 행문(行文)과 한역시의 압운을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글자이다.
閱雲(열운) : 구름을 읽다. 구름을 본다는 뜻이다. / 忽堪(홀감) : 문득 ~을 할 수 있다. 원시의 명쾌한 의미 전달과 한역시의 행문을 동시에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말이다. / 到巖傍(도암방) : 바위 곁에 이르다, 바위 곁으로 가다.
讀巖(독암) : 바위를 읽다. 바위를 본다는 뜻이다. / 復能(부능) : 다시 ~을 할 수 있다. 이 역시 원시의 명쾌한 의미 전달과 한역시의 행문을 동시에 고려하여 역자가 임의로 보탠 말이다. / 至雲邊(지운변) : 구름 곁에 이르다, 구름 곁으로 가다.

[한역의 직역]
산은 책이다

산은 무엇인가?
뜻 깊은 책이다
책장 넘기는 수고 빌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수려한 문장 잇닿았다
구름을 읽다 문득 바위 곁에 갈 수 있고
바위를 읽다 다시 구름 곁에 갈 수 있다

[한역 노트]
시인이 음영(吟詠)의 대상으로 삼은 산의 구름과 바위는, 산 위에서도 볼 수 있고 산 속에서도 볼 수 있고 산에서 제법 떨어진 데서도 볼 수 있지만, 산을 보통 책처럼 객관적으로 마주하는 대상으로 여긴다면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본다는 설정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 그런데 시인이 대표 격으로 예를 든 구름은 이따금 산을 찾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고, 바위는 산의 일부로 산과 영원히 함께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차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인의 관점을 따를 때, 글자를 보듯 산을 보는 것이 산을 읽는 것이 되고, 그 산을 읽는 것이 결국 산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된다. 시인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산을 책으로 만드는 그 작업은,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어서 결단코 타인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한 감동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수고롭게 굳이 산을 오르지 않아도, 또 산을 보려고 마을 밖을 나서지 않아도, 산을 감상할 수 있는 있다. 누워서 명승고적의 그림을 보며 그 곳을 마음으로 노닐어보는, 이른바 와유(臥遊)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얘기한 “책”이 옛사람들이 와유에 활용한 그런 화첩(畵帖)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 먼발치에 얼마간의 변화가 있거나 없기도 하는 산을 그림으로 걸어두고, 그윽하게 읽어가며 감상하는 일도 화첩을 감상하는 것만큼 즐겁지 않겠는가?

산과 관련된 숱한 성어 가운데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 산을 좋아하면 어진 자가 되는 줄 아는 사람들도 간혹 있는데 미안하게도 천만의 말씀이다.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이 말은, 어진 자는 등산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산을 배우려고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은 변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른바 불변부동(不變不動)이다. 이따금 구름과 어울리고 계절에 따라 겨우 옷만 갈아입을 뿐인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또 어느 누구만 편히 오르라고 쉬운 길을 따로 열어주지도 않는다. 공자(孔子)께서 이 말을 한 것은 ‘인(仁)’이란 이렇게 산처럼 변함이 없어야 하며, 또 사람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항간에 떠도는 말인 “내로남불”은 ‘인’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자께서 이 시대에 다시 오신다면 아마도 “내불남로”는 허여해주실 듯하다. 적어도 그것은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입장이어서, “내로남불”보다는 훨씬 더 인의 본질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불남불”이 공자께서 역설하실 보편적인 가치관이라면, “내로남로”는 중국의 서문경(西門慶)이나 이탈리아의 카사노바(Casanova) 같은 위인(爲人)들이 들려줌직한 다소 위험한 말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로남로”조차 동일한 잣대로 재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내로남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간단히 말해 “내로남불”은 조합이 가능한 네 가지 경우의 수 가운데 가장 고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나라로 인해, 그것도 우리식 발음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어느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자가 짐작하건대 전통시기였다면 이에 대한 상소문(上疏文)이 대궐의 문(門)보다 높이 쌓였을 것이다.

역자는 연 구분 없이 4행으로 이루어진 원시를 삼언(三言)과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이 섞인 6구의 고시(古詩)로 한역하였다. 짝수 구마다 압운하였으므로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篇(편)’·‘連(연)’·‘邊(변)’이 된다.

2021. 7. 20.

♣ 여적(餘滴) : 한역을 1차적으로 마무리한 후에 검토를 하려고 다시 읽고 있노라니 각 구(句)의 첫 글자들이 유난히 눈에 확 들어왔다. 세상에나! “山意不可閱讀(산의불가열독), 산의 뜻은 읽을 수가 없다.”라니! 산은 책이라고 노래한 시를 한역한 것인데 첫 글자들을 모은 문장의 뜻은 그 정반대가 되니 역자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얼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쳐볼까 하다가 그대로 두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더 이상 고치지는 않았다. 시인 선생님께는 다소 죄송스러운 일이기는 하여도, 맹세코 역자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이렇게 맞추어진 것일 뿐이다. 애초에 제5구의 첫 글자와 제6구의 첫 글자를 동일하게 '讀'으로 한역을 했다가 너무 밋밋하다는 생각이 들어 제5구의 첫 글자를 '閱'로 바꾸게 되었더랬다.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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