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리더십과 시대를 앞선 감각···'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김희경의 7과 3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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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그저 나쁜 지휘자만이 있을 뿐."
독일 출신의 지휘자 한스 폰 뵐로가 한 얘기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고 나면 흔히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좋다' 또는 '나쁘다'를 판단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실제 악단의 수준과 실력을 결정짓는 건 지휘자라는 의미입니다. 지휘자는 악기도 없고 연주도 하지 않는데, 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지휘자에겐 곧 오케스트라 자체가 악기가 됩니다. 그러니 지휘자의 손끝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최고가 될 수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동일한 악단이라 해도 어떤 스타일과 리더십을 가진 지휘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법으로 오케스트라 라는 악기를 완벽하게 연주해낸 지휘자엔 누가 있을까요. 많은 분들의 머릿속에 이 사람의 이름이 스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입니다. 카라얀은 베를린필 상임지휘자이자 종신 음악감독을 지내며 클래식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음악의 황제' '음악의 제우스' 등 화려한 타이틀은 모두 그의 것이었죠.
눈을 감은 채 은빛 머리를 휘날리며 격정적으로 두 손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지휘자의 표상으로 남았습니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마에스트로 카라얀. 그의 생애로 함께 떠나보실까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카라얀은 어릴 때부터 풍족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의사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피아노도 일찍 배울 수 있었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쟁심이 남달랐던 것 같은데요. 몸이 왜소했던 탓에 자신보다 큰 형에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음악으로라도 형을 이기려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피아노 실력은 빠르게 늘었고, 9살 땐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손목에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질병을 앓으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모차르테움 음악원 원장이었던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로 지휘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뛰어난 감각,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강렬한 욕망. 두 가지를 모두 가진 그는 젊은 시절부터 승승장구했습니다. 26세엔 아헨 극장의 최연소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됐죠.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지만, 음반사 EMI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의 도움으로 빈필,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의 지휘까지 맡게 됐습니다.
유럽의 주요 악단을 모두 휩쓸었던 카라얀. 그중에서도 그를 대표하는 악단은 단연 베를린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7년 29세에 처음 베를린필과 호흡을 맞췄던 카라얀은 베를린필에 강하게 매료됐습니다. 그리고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투구했죠.
베를린필의 미국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을 당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그는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어머니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공연 준비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47세에 베를린필 상임지휘자가 됐습니다. 종신 음악감독도 되어 무려 34년 동안 베를린필을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베를린필, 나아가 전 세계 클래식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습니다. 그는 엄청난 집념과 특유의 카리스마로 악단을 장악했고, 한층 완성도 높은 무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카라얀의 지휘법은 매우 독특했는데요. 처음부터 곡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은 채 지휘를 했습니다. 곡이 아무리 길어도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를 한 것이죠. 이를 악보를 통째로 외워서 기억하는 '암보(暗譜)' 지휘법이라고 합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오케스트라 각 악기들의 소리를 구분하고 정확히 지휘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요. 그는 정확성을 갖춘 것은 물론 폭발적인 에너지로 악단과 청중을 압도했습니다.
카라얀은 이 지휘법에 대해 "지휘 도중 눈을 감으면 음악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요. 이를 두고 실은 다양한 계산이 들어가 있다는 분석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엔 카라얀이 스스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음악을 눈을 감고 표현하면, 단원들이 그를 보며 무작정 따라오도록 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함께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손짓을 보며 일방적으로 맞추길 원했다는 것이죠.
이미지 관리를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눈을 감고 은빛 머리를 휘날리며 몰두하는 모습. 이 이미지를 통해 신격화된 마에스트로의 모습을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것이죠.
그는 실제 1965년 영상 제작사 코스모텔을 세워 다양한 이미지를 남기는 데 힘쓰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지휘를 카메라에 어떻게 담을지 하나하나 직접 결정하고 지시했을 정도입니다.
카라얀은 시대의 변화를 앞서 파악하고 적극 활용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40년대 LP가 나오자 많은 음악가들은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공연장 연주를 고집했는데요. 카라얀은 집에서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을 직감하고 LP 녹음에 매달렸습니다.
1980년대 CD가 등장했을 때도 가장 먼저 반응했죠. “CD는 기계적”이라는 비난에도 CD가 LP를 대체할 것이라 내다보고 CD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900여 장에 달하는 음반을 남겼고, 2억 장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이런 시도는 그가 20세기 클래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클래식을 감상하기 위해 음반을 집어 들면 대부분이 카라얀과 베를린필의 음반이었던 것이죠. 덕분에 생전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린 카라얀. 하지만 그를 두고 많은 비판도 일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소통 없이 목표만을 추구하는 그를 '독재자'라고 불렀죠. 레코딩과 영상 제작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선 '장사꾼'이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역사적 과오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던 것을 두고 '괴물' '악당'이란 지탄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한 명의 관객도 없이 공연을 해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공연의 티켓을 모조리 산 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죠. 텅빈 공연장에서 무대를 올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어쩌면 목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카라얀은 그 정도로 목표 지향적이었는데요.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한 사람은 목표를 너무 낮게 정한 사람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음악적 이상과 그에 부합하는 성과들을 내기 전까진 결코 만족하지 않았던 카라얀. 그로 인해 얻게 된 타이틀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그리고 '괴물'. 두 얼굴의 마에스트로 카라얀에 대한 상반된 평가와 논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