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관 건립 주장 미술계는 "시대 역행" 반발
박물관·미술관 벽 허무는 '이건희 기증관' 앞날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등 2만3천여 점이 다시 한곳에 모이게 됐다.

박물관도 미술관도 아닌 뮤지엄(museum) 개념의 새로운 공간이다.

해외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 모두 뮤지엄으로 통하지만, 우리나라는 두 기관이 철저히 구분돼왔다.

정부가 시대, 동서양, 분야를 망라하는 소장품을 전시할 '이건희 기증관'을 짓겠다고 발표하자 문화계는 다소 어리둥절한 반응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관(이건희 기증관)' 건립 방침을 밝히면서 후보지로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부지와 국립현대미술관 인근 송현동 부지를 꼽았다.

미술계는 그동안 근대미술품만 따로 분류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요구해왔지만, 유물을 포함한 모든 기증품이 모이게 됐다.

전국 20여개 지방자치단체가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나섰지만, 결론은 서울이었다.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 위원장인 김영나 서울대 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서 전시하는 게 기증 취지를 살리고 기증문화를 활성화하고 국민의 문화 향유를 높이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근현대 미술과 고미술이 나뉘어 있는데 하나의 뮤지엄 체계로 운영되는 새로운 시도"라고 덧붙였다.

이건희 회장 유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2만1천600여 점을 기증했다.

도자류, 서화, 전적, 불교미술, 금속공예, 석조물 등을 아우른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간 근현대 미술품 1천400여 점에는 국내외 대표 작가들의 회화, 판화, 소묘, 공예, 조각 등이 포함됐다.

광주시립미술관(30점), 전남도립미술관(21점), 대구미술관(21점), 양구 박수근미술관(18점), 제주 이중섭미술관(12점)에도 작품이 기증됐다.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촉구해온 미술계는 '이건희 기증관'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간사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이날 "기증품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몰상식하고 부끄러운 발상"이라며 "국민 여론과 전문가 의견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그는 "미술관이 전문적으로 분화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인데 기증관을 만든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한곳에서 제대로 연구하기 어려우며, 지역까지 나눠서 기증한 것을 다시 모으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모임이 최근 미술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이건희 컬렉션' 활용방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78.4%는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꼽았다.

'이건희 전시관 설립'은 11.5%였다.

별도 이건희 전시관을 건립할 경우 문제점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나눠 기증한 기증자의 뜻에 반함', '건립장소 선정의 어려움', '유형별, 시대별로 분류해야 하는 박물관학에 반함' 등의 의견이 많았다.

당국은 '이건희 기증관'을 통해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창의적인 융·복합 전시를 선보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문화계에서는 기증관이 소장품을 제대로 관리하고 연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인 배기동 한양대 명예교수는 "재산을 들여 모은 유물이나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기증된 유물을 특정 공간에서 보여주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립박물관 혹은 미술관이 중요한 이유는 소장품을 맥락을 갖고 보여주는 것이고,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며 "국민 세금으로 박물관, 미술관을 만들었는데 특정 목적으로만 한정하면 최고의 효율을 내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미술계 관계자는 "건물이 아니라 전문 인력이 중요하다"라며 "이건희 기증관에 제대로 된 연구 인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현실적으로 기증관이 독자적인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워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또 다른 분관 개념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근대미술관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