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서부의 아가씨' 리뷰
후기 푸치니의 진수를 보여준 성공적 초연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지난해에 국립오페라단(단장 박형식)이 '코로나19' 사태로 연기해야 했던 '서부의 아가씨' 한국 초연은 1일 오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깊은 예술적 감동으로 사로잡았다.

그런데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 보엠', '토스카', '투란도트'의 작곡가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가 왜 이제까지 한 번도 공연되지 않았을까? 박진감 넘치고 낭만과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작품이지만, 연주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4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 음량을 뚫고 나올 드라마틱 소프라노와 드라마틱 테너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탈리아어 오페라지만 바그너 전문 가수들이 주역을 맡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1910년 작품이어서 리듬과 화성이 대단히 정교하고 까다롭다.

오케스트라든 성악진에서든 한 사람만 실수해도 대혼란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도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2013년에 국립오페라단의 '돈 카를로'를 지휘했던 이탈리아 지휘자 피에트로 리초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이 푸치니 후기작의 다채로운 음악적 매력을 고루 살려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케스트라는 흔들림 없는 명료한 음악을 만들어냈고, 적재적소에서 강렬한 호소력을 보였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맞춰가는 리듬과 금관의 선명하고 풍요로운 음색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연주하기는 어려워도 관객의 귀는 즐겁다.

푸치니 특유의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민속음악, 재즈풍의 음악, 커플 댄스 음악의 요소들이 적절히 섞여 마치 영화음악 같은 극적이고 달콤한 효과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후기 푸치니의 진수를 보여준 성공적 초연
2018년 국립오페라단의 '코지 판 투테'를 연출해 호평을 받았던 이탈리아 연출가 니콜라 베를로파는 무대디자이너 아우렐리오 콜롬보와 함께 회화작품처럼 아름다운 무대를 선보였다.

원작의 배경인 1850년대 캘리포니아 탄광촌을 20세기 초로 옮겨놓으면서, 여주인공 미니가 사는 2막의 오두막집은 아늑하고 세련된 복층의 주거공간으로 변신했다.

광부들이 모이는 미니의 술집 '폴카'의 낡은 벽 사이로 눈 덮인 산들의 황량한 풍경을 보여준 1막 무대, 안개 낀 숲을 사실적으로 펼쳐 보인 3막 무대는 고향을 떠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수많은 주인공의 고된 삶을 말없이 웅변했다.

특히 2막에서 발레리오 티베리의 조명이 돋보였다.

미니의 집 1층은 두 공간으로 나뉘는데, 미니와 존슨이 처음으로 함께 식사할 때 그들이 앉아있는 오른쪽 공간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마음처럼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이 감싸고 있었지만, 보안관 잭 랜스와 남자들이 도적으로 판명된 존슨을 체포하러 그곳에 들어왔을 때는 차갑고 건조한 조명으로 바뀐다.

최고의 오페라극장에서 '투란도트'의 칼라프 왕자, '오텔로'의 타이틀 롤, '서부의 아가씨'의 딕 존슨 등 드라마틱 테너 주역을 도맡아온 세계적인 테너 마르코 베르티는 명징하고 압도적인 고음과 넘치는 성량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토스카와 미니 역을 통해 '클래스가 남다른 푸치니 가수'로 찬사를 받아온 소프라노 카린 바바잔얀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강인하면서도 여리고 섬세한 미니를 보여주었다.

보안관이지만 미니를 사랑해 존슨의 라이벌이 된 잭 랜스 역은 바리톤 양준모가 맡았다.

그는 발성과 성량, 무대 위의 카리스마와 음색의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완벽에 가까운 잭 랜스의 화신이었다.

후기 푸치니의 진수를 보여준 성공적 초연
이 밖에도 기량이 뛰어난 성악가들이 10여 명의 광부와 그 외의 조역으로 출연해 화려한 앙상블을 선사했고, 메트오페라합창단이 50명가량의 남성합창으로 참여해 감동적인 화음을 들려줬다.

1막의 술집과 3막의 숲 장면에서 무대를 꽉 채우는 인원이 등장했지만, 다채로운 의상(의상디자인 베라 피에란토니 주아)과 저마다의 개성 있는 연기로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펼쳐졌고, 이 점에서도 베를로파의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였다.

코로나19를 뚫고 이 어려운 작품을 높은 수준으로 준비한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에게 관객의 열광적인 갈채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테너 국윤종, 소프라노 이윤정, 바리톤 최기돈이 다른 팀에서 주역을 노래한다.

공연은 4일까지.
rosina@chol.com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