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에서 의원 입법안 발의 건수가 늘어난 주요 원인은 입법 실적을 채우기 위한 법안 ‘베끼기’와 ‘재탕 발의’ 때문이다. 특히 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서 보좌진이 전자입법시스템을 통해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자 법안 발의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의원 입법안 급증세가 법안 심사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어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봇물 터진 표절 법안

[단독] 베끼고 급조하고 재탕…입법실적 '뻥튀기'
의원 입법안이 늘어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베끼기 입법 관행 때문이다. 28일 기준 21대 국회 들어 처리된 법안 1915개 가운데 대안반영폐기된 법안은 1324개에 달한다. 폐기율은 69.13%. 이는 20대 국회(22.27%), 19대 국회(26.1%)에 비해 세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대안반영폐기란 국회 상임위원회 등에서 비슷하거나 중복되는 여러 법안을 하나로 합쳐 대안법안을 만든 뒤 기존 법안들을 폐기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안반영폐기 법안이 모두 표절 법안은 아니다. 특히 하나의 사안에 대해 여야가 각각 다른 지점에 중점을 두고 법안을 제출할 경우 해당 법안을 논의 과정에서 유사 법안으로 취급해 대안 법안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안반영폐기 법안의 대다수가 ‘베끼기 법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음 총선을 노리고 지역구를 관리해야 하는 의원들이 서로 입법 실적을 관리하기 위해 표절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있어서다.

이슈 나오면 발의하는 ‘날림 입법’

사회적인 이슈가 터졌을 때 입법 활동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급조하는 ‘날림 입법’도 의원 입법이 범람하는 주원인이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은 지난 24일 이른바 ‘새우튀김 환불 갑질’을 막기 위해 플랫폼 업체가 리뷰 및 배열 순위, 추천 수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전자상거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플랫폼 사업자들은 이 법안이 악의적인 소비자들의 리뷰를 플랫폼 사업자가 삭제하는 것까지 금지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과잉 입법의 부작용이 크지만 소비자 편을 든다는 이미지를 위해 우선 법안을 제출하고 봤다는 비판을 받는다.

올초 연예인 이휘재 씨가 자녀들의 층간소음 문제로 사회적 물의에 올랐을 때도 이에 대한 관심을 노린 ‘급조 입법’이 등장했다.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층간소음 방지를 위해 바닥충격음 저감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시공업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과 징벌적 손해배상, 사업등록을 말소할 수 있는 내용의 주택법 개정안을 지난 1월 발의했다. 이 법안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할 피해 규모를 산출할 수 없고, 시공업자의 책임은 이미 기존 주택법에 상당 부분 규정돼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법안은 현재 상임위 소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급할 땐 과거 법안 ‘재탕’

과거에 제출된 법안을 그대로 다시 내놓는 ‘재탕’ 법안도 실적을 채우기 위한 대표적인 입법 기술이다. 입양아가 양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정인이 사건’ 당시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은 아동학대를 신고할 의무를 지닌 이가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내야 하는 과태료를 5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올리는 내용의 아동학대처벌방지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의했다가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된 법안과 제안 이유와 내용이 같다. 한 의원 비서관은 “과거 한 의원실에 근무했던 보좌진이 다른 의원실로 이직한 뒤 기존에 제출했던 법안을 재활용하곤 한다”며 “실적이 급한 의원실에서 과거 국회 법안을 적극적으로 참고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부실 법안이 쏟아지는 사이 정작 제도 개선이 시급한 법안들이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기업 생태계 혁신과 관련된 법안 37건의 입법 현황을 분석한 결과 생태계 혁신법안의 73%가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안이다. 이 법률안은 지난 18대 국회에서 첫선을 보인 후 약 10년간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의료민영화 논란 등이 일며 매번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 21대 국회에서도 법안이 제출됐지만 지난 2월 공청회를 한 후 논의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